[여의춘추-이흥우] 재벌, ‘오적’ 띠지는 떼야하지 않겠나 기사의 사진
그제 끝난 20대 개막국회의 화두는 단연 격차해소였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필두로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에 이르기까지 좌우 구분 없이 국회 대표연설을 통해 격차해소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학력과 직업은 물론 평균수명마저 부(富)에 의해 결정될 정도로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으니 당연하다 하겠다.

돈이 돈을 버는 세상이다. 제아무리 발버둥쳐도 임금소득이 자본소득을 도저히 따라잡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 절대다수의 임금노동자는 뼈 빠지게 일해 봤자 쥐꼬리 연봉을 받는 게 고작인데 대기업 오너와 CEO는 거액의 연봉 외에 연봉의 몇 배에 해당하는 배당금까지 챙긴다. 자본주의 체제에선 당연한 일이라 해도 과도한 배당이 사회정의와 상식에 부합하는지의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고대사회에서도 이런 논란은 있었다. 한비자는 개인 이익에만 관심 있는, 지금의 재벌이나 기업인에 해당하는 ‘상공지민(商工之民)’을 나라를 좀먹는 오두(五?·다섯 벌레)의 하나로 지목했다. 상공지민이 물건을 비싸게 팔고, 돈 될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긁어모아 열심히 일하는 농부의 이익을 훔쳐간다는 이유에서다. 그리고 2200여년이 흘러 재벌은 나라를 도적질하는 오적(五賊)의 첫째가 된다. 김지하는 담시 ‘오적’에서 “…천원 공사 오원에 쓱싹…/ 둘러치는 재조는 손오공 할애비요 구워삶는 재조는 뙤놈 숙수 뺨치겄다”고 재벌을 조롱한다.

재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여전하다. 500억원 가까운 계열사 자금을 횡령하고 몇 년 옥살이를 해도 오너는 최고경영자로 복귀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롯데그룹은 오너 일가에 뭉텅이로 퍼주다 끝내 탈이 났다. 국민 세금으로 한바탕 돈 잔치를 벌인 대우조선해양은 도덕적 해이의 끝판왕이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며 세금 깎아주고, 규제를 풀어줬더니 이런 식으로 국민들 뒤통수를 친다. 심판해야 하는 건 ‘배신의 정치’가 아니라 ‘배신의 경영’이다.

보수정권이 진보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업의 세금 부담을 낮춰준 이유는 경제 활성화에 있다. 정부는 세금 감면→투자 확대→고용 창출→소비 증가로 선순환하는 낙수효과를 기대했다. 하지만 정부의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갔다. 세금 감면은 투자 확대로 이어지지 않았고 재벌 배만 불려주는 결과를 낳았다. 1990년대 말 28%(최고세율 기준)였던 법인세율이 지금의 22%로 떨어지는 사이 기업의 총 부채는 2분의 1로 줄었고, 30대 재벌이 쟁여둔 사내유보금은 700조원에 이른다. 반면 이 기간 가계부채는 네 배로 늘었다. 이대로 두면 부의 쏠림이 심화되는 건 명약관화하다.

아시아 최고 재벌, 홍콩 청쿵그룹 리카싱 회장이 당국에 법인세 인상을 촉구한 게 지난달이다. 법인세를 올려 가난한 사람들과 청년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세계 최고 부자, 워런 버핏도 증세를 이야기한다. 미국의 법인세율이 40%인데도 말이다. 우리나라 법인세율은 세계 평균(23.6%)을 밑돌고, 주요 수출 경쟁상대인 일본(32%)에 비해서는 무려 10% 포인트 낮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는 버핏이나 리카싱 같은 재벌이 없다. 증세 얘기만 나오면 “망한다”고 아우성이다.

권력은 5년마다 바뀐다. 하지만 금력(金力)은 임기가 없다. 게다가 세습까지 된다. 더민주 김 대표가 대표발의한 상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됐다. 재벌 지배구조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확보하자는 취지다. 감세에 따른 과실만 따먹고 사회적 역할을 도외시하는 재벌의 행태를 고려하면 이 법은 통과되는 게 맞다.

이흥우 논설위원 hw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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