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봉관 <4> 짚신도 못 신고 일 다닌 맨발은 늘 상처투성이

어느날 알아채신 어머니 눈물 펑펑… 어머니 사랑에 고난 이겨낼 힘 얻어

[역경의 열매] 이봉관 <4> 짚신도 못 신고 일 다닌 맨발은 늘 상처투성이 기사의 사진
이봉관 장로(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대학 졸업식 때 가족과 함께한 모습. 어머니(앞줄 오른쪽 두 번째)는 이 장로의 어린 시절 ‘인내’의 원천이었다. 서희건설 제공
다른 또래 친구들은 여름에 짚신을 신고 다녔지만 피부가 약한 나는 짚신을 신을 수 없었다. 짚신을 신고 걷다 보면 이내 발바닥과 뒤꿈치에 상처가 나고 짓물러 고통스러웠다. 결국 시골길을 맨발로 다녀야 했다. 하지만 맨발의 소년이 겪어야 할 고통도 만만치 않았다.

농사일과 함께 주로 했던 것이 소를 먹이는 일이었다. 소를 산에 풀어 놓고 꼴을 먹게 한 다음 해가 지면 소를 몰고 집으로 오는 일이다. 등에는 소에게 먹일 꼴을 잔뜩 짊어지고 한 손으론 소를 몰고 내려가는데 오가는 길목에 어찌나 뾰족한 돌들이 많은지 지뢰밭이나 다름없었다. 잠깐 한 눈을 팔다 맨발로 돌 모서리를 밟을 때면 발바닥이 찢어지면서 피범벅이 됐다. 돌을 피해 발을 디디려다 논두렁으로 굴러 떨어져 크게 다친 적도 있다.

발에 난 상처가 아픈 것도 힘든 일이었지만 집에 돌아와 그 상처를 숨기는 것도 역시 힘들었다. 상처 난 발이 아픈 것보다 어머니가 보시고 마음 아파하실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더 아팠다. 상처가 쓰라려 절뚝거리다가도 집에 도착하면 어머니 앞에서 바로 걷는 연기를 해야 했다. 잠을 잘 때도 이불을 몸 아래로 덮어 발을 가리느라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발을 숨긴 채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뒤척이면서 드러난 내 발을 어머니가 발견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내 발을 붙들고 서러움에 크게 소리를 내어 우셨다. 나는 벌떡 일어나 어머니께 소리를 질렀다.

“그깟 발바닥 상처 난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울어! 이 동네 아이들 다 그래. 엄마 없이 사는 애들도 많아. 그래도 나는 엄마도 있고 누나들도 있잖아. 이거 조금 찢어진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어머니의 서러운 눈물을 보니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아파서 도리어 큰소리치면서 아무 일도 아닌 듯 행동한 것이다. 몸과 마음이 모두 고됐던 유년 시절은 그렇게 어린 봉관이를 ‘효자 봉관이’로 만들어 놓았다. 어릴 때 돈이 없어 고생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만 있으면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없이는 못 살 것 같았다. 어머니는 하나님 다음으로, 이 세상에서 아들 봉관이를 가장 우선으로 사랑해주셨다. 내 삶 가운데 그 무엇도 뚫을 수 없는 든든한 방패가 어머니였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사랑했고 어머니 또한 나를 끔찍이 사랑하셨다.

한 번은 곧 죽을 정도로 심하게 아팠던 적이 있었다. 사경을 헤매며 누워 있는데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들렸다.

“하나님, 제발 우리 관이를 살려주세요. 북한에 있는 제 남편은 돌아오지 못해도 좋습니다. 관이만 살려 주시면 그 어떤 것도 구하지 않겠습니다.”

기도는 절규에 가까웠다.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누워만 있던 내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몸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나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감사해서, 내 몸 하나 제대로 간수를 못해 그렇게 나를 사랑해주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너무 죄송해서였다. 그 뒤로도 어머니는 내가 살아있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 수 있었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어머니에게 나는 삶의 전부였다. 그런 어머니는 내가 숱한 역경 속에서 끊임없이 키워 온 ‘인내’의 원천이었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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