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뉴스] ‘한국의 테이트모던’… 느리게 가야 길 보인다 기사의 사진
독일 철강산업의 쇠퇴로 1985년 문을 닫게 된 뒤스부르크의 제철소를 리모델링해 탄생한 ‘뒤스부르크환경공원’ 내부 시설. 한국중부발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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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압축적 경제성장을 이뤘지요. 우리의 DNA가 된 듯한 '빨리빨리 정책'이 배경에 있습니다. 신속한 결정 과감한 시행, 바로 그거죠. 문화행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과주의·전시행정의 폐해는 적지 않았습니다. 21세기는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더디 가도 제대로 가자. '슬로(Slow) 정책'을 하자는 겁니다. 서울복합화력발전소(구 당인리발전소, 이하 당인리발전소)가 신개념 시민참여형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합니다. 기존에 없던 문화공간 실험입니다. 그래서 더욱 '슬로, 슬로'의 행보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영국의 템스 강변에 있는 테이트모던 갤러리는 수십 년 방치됐던 화력발전소가 세계 최대 규모의 현대미술관으로 탈바꿈한 케이스입니다. 지금은 입장객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을 능가하는 현대미술의 메카가 됐습니다. 독일 에센에 위치한 졸페라인은 폐광을 유지한 채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기도 했습니다.

당인리발전소가 한국의 테이트모던, 한국의 졸페라인으로의 변신을 앞두고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현재의 발전소 4, 5호기의 지하화 공사가 2017년 완전 마무리되는 것에 맞춰 당인리발전소를 문화창조력을 전파하는 문화창작발전소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최근 발표했지요.

당인리발전소는 국내 1호 화력발전소입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 등장했습니다. 식민지 경성의 전차와 불빛을 밝히는 전기가 이곳에서 생산됐지요. 경이로운 근대의 상징이었습니다. 당인리발전소는 경제발전의 불도저 소리가 요란하던 1970년대에는 유행가에도 등장할 정도로 친근해졌습니다. “밤 깊은 마포 종점∼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을 흥얼거리며 퇴근 후의 피로를 달랬던 거지요. 근대화 뒤안의 애환까지 껴안은 ‘당인리발전소’. 산업역군처럼 든든한 철골 트러스트 외관, 우뚝 솟은 2개 굴뚝이 야간조명이 멋지게 투사되는 한강변의 21세기 문화 아이콘으로 거듭납니다.



부수지 않고 보존…1기는 내부도 그대로

완전히 부수고 새로 짓는 식이 아닙니다. 5호기는 외관은 유지하고 내부는 뜯어내 새롭게 사용하기로 했습니다만, 4호기는 대형 터빈과 구불구불 보일러가 내장처럼 얽혀 있는 내부도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지난달 말 열린 ‘당인리 문화창작발전소 조성을 위한 세미나’에서 밝혀진 정부 용역안입니다.

이는 신개념 랜드마크입니다. 한강의 다른 끝, 국내 최고층인 123층 잠실 롯데타워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과거의 역사와 사람의 체취를 미래의 공간에 스미게 하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당인리발전소를 문화공간으로 만든다는 구상은 2004년 공론화됐습니다. 그때만 해도 발전소는 이전하고, 기존 시설은 부수고 새 건물을 짓는 안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다 발전소를 지하화하기로 하면서 원래 건물을 활용하는 안으로 바뀐 겁니다. 산업유산의 보존이라는 새로운 문화정책 트렌드도 반영됐지요.

문제는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문체부는 시민참여형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드는 안까지는 정했습니다. 시민참여형? 그럴듯하지만 애매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정답을 찾지 못한 정부의 어정쩡한 입장을 반영하고 있거든요.

문체부 신은향 시각예술디자인과장은 28일 “10여년 사이 문화지형이 크게 바뀌었다. 처음에는 예술창작자를 위한 공간으로 구상됐다. 그러나 그사이 창작자를 위한 레지던시가 많이 생겨났다”면서 “시민의 문화향유권이 새롭게 대두된 현실도 반영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세미나에서는 예술인거리로 유명한 홍익대 주변의 젠트리피케이션 문제가 심각하니 점점 밀려나는 젊은 예술인들도 껴안아 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아예 화력발전소 박물관으로 쓰자는 주장도 나왔지요.



답을 모를 때는 천천히 가면 어떤가

산업유산을 재활용한 복합문화공간은 산업화의 역사가 오래된 서구에서는 1970년대부터 등장했습니다. 한국에서도 낯설지는 않습니다. 옛 서울역사를 활용한 ‘문화역서울284’, 국군기무사령부 건물을 사용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등이 그런 예지요.

당인리발전소는 건축물의 성격상 기존과는 다릅니다. 화력발전소의 변신은 처음입니다. 기존 사례는 모두 벽돌건물이었습니다. 사무실 등 사람이 쓰는 공간이었습니다. 당인리발전소는 철골 트러스트 구조인데, 전기를 생산하기 위한 터빈과 보일러 등 기계가 공간의 주인이었습니다. 지상 6층 구조물이지만 층은 기계를 유지·보수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습니다. 내부 설비를 뜯어내면 6층 전체가 거대한 한 덩어리 공간이 됩니다. 이런 아득한 천장을 가진 복합문화공간은 지금껏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주장도 나옵니다. “산업유산 재활용에 관한 판단이 정확히 서지 않을 때는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어설픈 지식과 부족한 재원으로 성과를 거두기 위해 관광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또 다른 난개발이 될 수 있고 소중한 유산을 잃어버리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건축가 황순우(바인건축사 대표)씨는 “당장 답을 찾기보다 파일럿 프로그램을 통해 어떤 안이 가장 어울리는지 찾아가는 ‘과정의 행정’이 필요하다”고 제안합니다. 파일럿 프로그램은 아이디어를 시험하는 시범 프로그램입니다.

터빈이 들어찬 공간에서 영상을 틀어보고 거친 철골 구조 안에서 전시·공연도 해보는 것이지요. 정형화된 공간이 아닌 산업적 인공미가 물씬 뿜어나는 낯선 공간에서의 경험을 테스트해보는 겁니다. 생산과 소비를 연결시키려면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는지, 소비자에게 완전 개방했을 때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테스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21세기는 생산과 소비의 칸막이, 예술 장르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융합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답 찾기가 더욱 쉽지 않습니다.

문화관광연구원의 김연진 연구원은 “외국에서도 3년 정도 시범 가동하는 것은 기본”이라며 “핀란드의 발전소·가스공장이 탈바꿈한 수비라티(Suvilati)가 32년 걸려 해답을 찾는 등 수십 년 동안 고민하는 사례들이 적지 않다”고 말합니다.

정부는 조바심을 내는 듯한 인상입니다. 서두르지 말 것을 제안합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나아가는 새로운 정책 실험, 초유의 ‘슬로 정책’ 실험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한 번 결정돼 시행되면 번복하기 힘든 게 행정입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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