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전석운] 트럼프·샌더스가 바꾼 美정치 기사의 사진
미국 정치판에서 1년 전만 해도 ‘설마’ 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부동산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전당대회에서 공화당의 대선후보가 됐고, 무소속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가 민주당의 정강정책을 바꿔놓았다. 트럼프는 잇단 막말로 자질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현재 지지율은 민주당의 대선후보 힐러리 클린턴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샌더스는 비록 경선에서 패했지만 11월 대선과 함께 선거를 치르는 민주당의 총선 후보자 100여명으로부터 지지연설 초청을 받을 만큼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트럼프는 6개월 전만 해도 주류들의 견제로 대선후보를 거머쥐기가 쉽지 않다는 전망이 많았다. 그러나 3월 초 ‘슈퍼 화요일’의 승자로 올라선 트럼프는 경선 내내 독주했다. 전당대회에서 대선후보로 선출된 트럼프는 공화당의 전통적인 자유무역주의를 버리고 주요 우방국들과의 군사동맹 전략을 폐기하겠다고 선언했다. 공화당의 주류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샌더스 역시 애당초 클린턴의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었다. 퍼스트레이디, 연방 상원의원, 국무장관을 거쳐 여성 최초의 대통령에 도전하는 ‘역사’를 만들어가는 클린턴에 비해 샌더스는 정치권의 무명인사에 가까웠다. 주 인구(62만여명) 전체가 미국에서 두 번째로 적은 버몬트 출신 상원의원인 샌더스는 무소속이었다. 인맥과 자금동원 능력에서 두 사람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클린턴은 샌더스를 상대로 힘겨운 선거를 치렀다. 샌더스는 22개주에서 클린턴을 눌렀다. 그 결과 샌더스는 일반 대의원 중 45%의 지지를 확보했다. 경선 결과에 상관없이 후보를 선택할 수 있는 슈퍼 대의원들(15%)의 일방적 지지가 없었다면 클린턴의 승리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클린턴은 전당대회에서 대선후보로 선출됐지만 샌더스 지지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당의 정강정책을 샌더스에게 양보했다. 샌더스의 요구대로 최저임금을 현행 시간당 7.25달러에서 두 배가 넘는 15달러로 인상하도록 했고, 중산층 이하(83%) 가정의 자녀에게는 공립대 등록금을 내지 않도록 했다. 건강보험개혁 등 역대 가장 진보적인 민주당의 정강정책이 만들어진 건 샌더스의 입김이었다.

트럼프와 샌더스는 인생역정이 많이 다르다. 트럼프는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아 부동산재벌이 된 이른바 ‘금수저’다. 초호화 저택에 살고 전용 제트기를 몰고 다닌다. 반면 샌더스는 폴란드 출신 유대인 부모 밑에서 자라 풍족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공통점은 유권자들의 분노를 효과적으로 대변했다는 데 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그가 아무리 막말을 해도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읽고 이를 정치의 실패와 무능으로 돌려 조롱하는 데서 쾌감을 얻고 박수를 보냈다. 자칭 사회주의자인 샌더스의 정치적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미국인 상위 1%가 부의 90%를 가져간다’며 부의 양극화와 임금 불평등 해소를 부르짖는 그의 주장에 등록금 부채와 실업난에 시달리는 젊은이들과 백인 노동자들은 환호했다.

기존 정치가 유권자들의 분노를 읽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들에게 점령당하는 일은 미국뿐 아니라 영국과 필리핀 등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한국도 기존 정치권력이 아웃사이더에 점령당할 가능성이 큰 조건을 갖추고 있다. 실업난과 양극화에 고통받는 계층이 많아지고 있는데 정치권은 유권자들의 분노를 제대로 대변하거나 어루만지지 못하고 있다. 한국 유권자들의 분노가 폭발한다면 지금의 정당과 정치인들이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워싱턴=전석운 특파원 swch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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