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봉관 <8> 꿈 잃고 주님 잊은 채 지낸 대학시절 부끄러워

겨울날 한밤중 찾은 교회 예배당서 마음 속 회개 쏟아내고 희망 되찾아

[역경의 열매] 이봉관 <8> 꿈 잃고 주님 잊은 채 지낸 대학시절 부끄러워 기사의 사진
이봉관 장로의 포스코 재직시절 모습. 그는 대학 졸업 후 1970년 공채 2기로 포스코에 입사해 13년간 몸담았다. 서희건설 제공
프로보스트 선교사님의 배려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통학에 대한 걱정은 덜 수 있었지만 입사 조건으로 나에게 맡겨진 장애인 도우미 역할은 물리적·정신적으로 큰 부담을 줬다. 점자책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학교 수업을 마친 후 매일 저녁, 하루 동안 배운 모든 수업내용을 점자로 옮겨 적을 수 있도록 시각장애인 학우에게 읽어줘야 했다. 밤 10시를 훌쩍 넘겨 그 작업을 끝내고 나면 너무 피곤해 정작 내가 공부할 기력이 남아있질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학 진학까지 지원을 약속했던 선교사님 부부가 고3이 되던 해 본국으로 소환되면서 도움이 끊길 형편이 됐다. 이런 상태로 어느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갈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불굴의 의지로 버텨가며 공부 시간을 마련하는 길밖에 없었다. 새벽잠을 줄여가며 공부에 매진한 끝에 경희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운의 꿈을 키워가야 할 나의 대학 시절은 어느 샌가 꿈과 희망 없이 표류하고 있었다. ‘이렇게 고되기만 한 대학 생활을 마치고 졸업한들 내가 무엇이 될 수 있을까’라며 자조하는 날이 많아졌다. 무뎌지다 못해 녹이 슬어가는 칼날처럼 나 자신이 쓸모없는 사람이 돼 가는 것 같아 신경쇠약증, 불면증에 시달렸고 체중은 45㎏까지 줄었다. 삶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죽을 수도 없었다. 당신의 아들만 바라보고 사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니 도저히 가당치가 않았다. ‘나는 왜 죽을 수도 없는가’라며 절규했던 욥의 모습이 곧 내 모습이었다.

성탄절이 다가올 때면 골목마다 전축가게에서 울려 퍼지는 캐롤 음악이 듣기 싫어 귀를 막았다. 3학년이 되던 성탄절 날, 문득 어린 시절 성탄절에 시골 교회에서 동무들과 같이 밤을 새고 떡국을 먹고 ‘새벽송’을 돌던 때가 떠올랐다. 이튿날 늦은 밤 교회를 찾아갔다. 예배당 장의자에 기댄 채 홀로 눈물을 쏟아냈다. 슬픔과 괴로움이 함께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대학시절을 돌아보니 지금 내 모습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다. 나는 하나님 은혜가 아니었다면 초등학교도 못 나오고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 인생이었다. 감사가 넘쳐날 상황이었는데도 하나님께 불평만 늘어놓는 배은망덕한 놈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가만히 눈을 감으니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봉관아. 서울대나 하버드대를 나와야만 성공할 것 같으냐? 내가 너와 함께하지 않는다면 네가 무얼 할 수 있겠느냐.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내가 함께해야 무엇이든 능히 할 수 있으리라.”

곁에 계신 주님은 보지 않고 현실만 바라본 채 살아 온 나를 돌아보니 마음속에서 회개가 복받쳐 나왔다. 그 마음이 찬송의 고백이 됐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외면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하나님은 한없이 작은 자인 내 투정과 원망도, 주님에 대한 배신도 사랑으로 용서해 주셨다. 예배당을 나서며 ‘하나님. 앞으론 어떠한 역경이 와도 다시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결단했다. 그날 이후 하루하루가 기쁨으로 시작됐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했고, 힘에 부치는 순간이 와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학업에 임했다.

무사히 학사모를 쓴 내게 하나님은 ‘포스코(POSCO) 공채 2기 입사’라는 축복을 주셨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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