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태기획] 지하철·백화점·PC방… ‘쌈짓돈 피서’ 부쩍 기사의 사진
요즘 최모(69·여)씨는 1주일에 서너 번꼴로 지하철 나들이를 떠난다. 서울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타서 오금역까지 간다. 이어 오금역에서 다시 안국역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오가는 두 시간가량이 최씨의 ‘찜통더위 피하기’ 방법이다. 시원한 전동차 안에서 책도 읽고, 바람도 쐬면 답답한 집에 있는 것보다 백배 낫다고 한다. 서울시에서 주는 ‘노인 무임용 지하철 교통카드’ 덕분에 차비도 들지 않는다.

최씨는 2일 “집에 에어컨이 있긴 하지만 전기요금 많이 나온다는 남편 성화에 실제로 트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주로 집에 있기 눈치 보이는 할아버지들이 쉬려고 지하철을 많이 찾는다. 남편에게도 집에만 있지 말고 지하철을 타라고 권한다”고 말했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면서 ‘쌈짓돈 피서’를 보내는 이들이 늘고 있다. 산과 바다로 떠나거나 해외여행을 나가기엔 부담스럽고 누진제가 적용되는 전기요금도 무서워 대중교통, 백화점, 무더위 쉼터, PC방 등을 찾고 있다.

이모(67·여)씨는 최근 집보다 무더위 쉼터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병원에 가는 날만 빼곤 오전 9시 집 근처 주민센터로 ‘출근’해 오후 5시까지 친구들과 지낸다. 무더위 쉼터로 지정된 경로당이나 주민센터에선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냉방을 해준다. 이씨는 “돈 안 들이고 하루 종일 놀 수 있는 데가 어디 있겠느냐”고 했다.

젊은이들도 ‘도심형 피서’에 적응하고 있다. 직장인 박모(27)씨는 주말이면 PC방에서 밤샘을 한다. 열대야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괴로울 바에야 냉방 잘되는 PC방에서 게임도 하고 피서도 하는 것이다. 1만원 정액권을 끊으면 11시간을 꼬박 보낼 수 있다. 박씨는 “시원한 데다 편하다. 요새 PC방은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나 커피도 팔아서 웬만한 식당과 카페 못잖다”고 말했다.

PC방 피서가 늘면서 게임 이용시간도 증가하고 있다. 게임업체 넥슨 관계자는 “기후 환경에 따라 게임 이용자 수가 변하는데, 혹서 기간엔 전체 게임 이용시간이 늘어난다”며 “지난달 한 온라인게임의 업데이트 이벤트인 ‘PC방으로 피서 가자’가 큰 호응을 이끌어내면서 이 게임의 점유율이 상승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백화점도 즐겨 찾는 피서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에 따르면 일찌감치 폭염이 찾아오면서 지난달부터 방문고객 수, 고객이 백화점에 머무르는 시간이 함께 증가하고 있다.

‘쌈짓돈 피서’는 경기 불황의 ‘어두운 그림자’이기도 하다. 지갑이 얇아지면서 휴양지로 떠나는 비용을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온라인 리서치회사인 마크로밀 엠브레인이 지난달 1∼6일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여름휴가에 여행을 가야 하는가’는 질문에 ‘가지 않아도 좋다’는 응답이 50.6%나 됐다.

직장인 김모(46)씨는 “알뜰하게 더위를 피하는 건 좋지만 여름휴가에 산이나 바다로 떠나는 여행을 꺼려한다는 건 ‘소득 감소→소비 위축→경기 침체→소득 감소’라는 악순환에 빠진 우리 경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주환 기자 johnny@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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