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능호집’ 첫 완역… 꼿꼿한 한문학자의 18년의 결실 기사의 사진
이인상의 초상화(오른쪽). 종이에 채색. 작자 미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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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둘에 번역을 시작해 환갑을 맞는 올들어서야 책을 손에 쥐었다. 초스피드의 삶, 속성 문화가 판치는 시대에 흔치 않은 일이다. 최초로 완역돼 최근 출간된 ‘능호집(凌壺集) 상·하(돌베개 출판사)’에는 한 꼬장꼬장한 한 한문학자의 18년에 걸친 질긴 노력이 숨어 있다.

‘능호집’ 번역에 중장년을 바친 이는 서울대 국문과 박희병(사진) 교수다. 홀가분하게 여름휴가를 즐기고 있는 그를 3일 전화 인터뷰했다.

‘능호집’은 조선 중기의 서얼 출신 문인화가 능호관(凌壺觀) 이인상(1710-1760)의 시와 산문을 모은 문집이다. 이인상은 세종의 열셋째 아들인 밀성군 이침의 후손으로, 고조부인 이경여는 최고 관직인 영의정을 지냈으나 증조부가 서얼이었다.

박 교수는 연암 박지원을 연구하던 중 한 세대 위의 선배인 이인상에 주목하게 됐다. 박지원을 ‘근대’라는 프리즘으로 이해하려는 학계의 경향에 반발해 한 세대 위에서 박지원을 ‘부감’하고자 했다.

이인상은 청나라가 전성기를 맞았음에도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고 청을 배척하는 ‘존명배청’(尊明排淸)의 이념을 평생 견지한 이였다. 이인상이 “말을 하면 개 짖듯 여긴다”고 한 것은 이런 상황을 반영한다. 박 교수는 “연암은 청의 선진문물을 배우자는 북학파의 중심인물이라는 점에서 이인상을 극복했지만, 동시에 이인상이 지녔던 선비로서의 기개, 재야 처사로서의 권력 비판적 태도는 연암에게 면면히 흐른다”고 말했다.

능호집 번역은 2000년 탈고됐다. 시·서·화와 모두 능했던 이인상의 문학은 서화와 한 덩어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서화에 대한 추가 연구를 통해 보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건 그 즈음이다. 박 교수는 책을 내려던 출판사를 말리며 새로 서화 연구에 매달렸다. 이인상의 서화 작품을 찾아 박물관 뿐 아니라 개인소장본, 해외 소장본까지 모두 자료를 입수해 그림에 쓴 글귀인 ‘제발’을 해독했다. 제발에는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 배경 등을 적는다. 박 교수는 “그동안 미술사 연구에서는 제발에 대한 연구 없이 그림만으로 중국과 양식을 비교하는 등 한계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페이지마다 꼼꼼하게 달린 주석에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노고가 숨어 있다. 그는 “그야말로 3D직종”이라고 웃으면서 “옛 지명, 등장인물의 자나 호를 밝혀내기 위해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등을 일일이 뒤졌다”고 말했다. 이인상의 출생지 등 생애와 관련된 오류를 잡아낸 것은 특히 큰 수확이다. 예컨대, 말년의 거처는 기존에 알려졌던 대로 현감을 지낸 음죽(현 경기도 장호원) 인근이 아니라 한양의 남산 일대라는 것이다. 미술사학계에서는 이인상이 말년에 시골에 은거했다는 점을 들며 말년 그림에 은거의 쓸쓸한 기운이 감돈다는 식의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능호집’은 상권은 시, 하권은 산문으로 구성돼 있다. 이인상의 서화 연구에 대한 결과물은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 ‘능호관 이인상 서화집’ 이라는 제목으로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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