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한승주] 루쉰과 윤봉길의 꿈 기사의 사진
한 장면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중국인 의학도 루쉰(1881∼1936)이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이다. 수업시간에 상영된 영상 속에는 러시아 스파이였던 한 중국인이 일본군에 체포돼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쉰의 피는 거꾸로 솟았지만 이 장면을 본 일본 학생들은 박수치며 환호했고, 이 일로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어리석고 약한 국민은 결국 조롱거리가 될 뿐이라고 생각한 루쉰. 의학보다 급한 것이 있다고, 중국 민족을 구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사람들의 정신을 바꾸는 것이 시급하다고 깨닫는다. 오늘날 중국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가 의학을 단념하고 문학을 하게 된 계기다.

지난주 중국 여행길에 상하이 루쉰 공원(옛 훙커우 공원)에 있는 루쉰 기념관을 찾았다. 루쉰이 살았던 집 일부를 복원한 기념관에는 그의 생애와 문학적 업적을 기릴 방대한 자료와 상세한 설명이 있었다. 그의 친필원고, 사진, 세계 각지에서 출판된 저서, 그가 머물렀던 방 모형, 사용했던 생활용품, 중요한 회의 장면을 밀랍인형들로 재현한 공간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묘지와 동상이 있는 기념관 주변엔 울창한 나무와 호수가 있고, 공원에는 조깅을 하거나 삼삼오오 체조하는 시민들로 넘쳤다.

발길을 같은 공원 안 윤봉길기념관으로 옮겼다. 루쉰 기념관에서 걸어서 5분 거리다. 규모는 루쉰 기념관과 비교할 수 없이 초라하지만, 1932년 윤봉길(1908∼1932) 의사가 수통 폭탄으로 거사를 일으켰던 현장에 ‘매헌(梅軒)’이라는 작은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서 가슴이 철렁한 사진을 만났다. 4월 29일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된 뒤 그해 12월 순국한 모습이다. 두 팔을 나무에 고정시켜 벌리고, 헝겊으로 눈을 가렸으며 이마에 총살자국이 있었으나 몹시 당당해 보였다. 그 당당함이란 한번 보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거사 당시 윤 의사는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두 아들에게 남긴 편지가 있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로 시작된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일제 경찰의 감시로 농촌계몽운동에 한계를 느낀 윤 의사는 1930년 부모와 아내 자식을 남기고 고향을 떠난다. 어린 자식에게 독립된 나라를 물려주는 것이 그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리라.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도 성큼성큼 걸어간 그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루쉰과 윤봉길. 두 사람은 나라는 달랐지만 일제로 인해 핍박받는 민족을 계몽하겠다는 꿈은 같았다. 루쉰이 의학을 접고 문학을 통해 계몽의 길에 나선 것이 스물다섯, 윤봉길이 수통 폭탄을 투척한 나이가 스물넷이다. 그들의 빛나는 청춘이었다. 두 사람 모두 비참한 현실에도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꿈꿨다.

광복절이 다가온다. 70주년이라고 떠들썩했던 지난해와 비교해선 조용한 편이다. 기록적인 폭염과 여름휴가, 올림픽에 묻혀 잊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루쉰은 위대한 문학가 겸 사상가로서 중국인들은 물론 세계인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이에 비해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윤봉길 의사는 우리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서울에 매헌기념관이 있긴 하지만, 그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젊은 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방식이 소홀한 것은 아닌지, 우리가 그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건지 다시 점검해 볼 때다.

한승주 문화팀장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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