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상직 <6> 불판닦기·푸시맨… 고된 일 하며 돈 모아

학비 벌기 안간힘, 너무 지쳐 코피도… 현대 입사 후 첫 월급은 빨간 내의

[역경의 열매] 이상직 <6>  불판닦기·푸시맨… 고된 일 하며 돈 모아 기사의 사진
1990년 현대그룹 재직시절. 세 번째 줄 왼쪽 네 번째가 이상직 전 의원.
친구가 술값과 바꿔버린 대입원서 덕분에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동국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1980년대는 사회적으로 암울한 시절이었다. 둘째 형이 대학입학 기념으로 양복을 사서 입으라며 준 20만원으로 그 당시 갖고 싶었던 기타를 샀다. 고교 2년 때 같은 반 중 절친했던 9명이 있었다. 이 중 한 친구가 대학가요제에 나가기 위해 밴드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기에 옷보다는 기타가 필요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학교 매점으로 찾아왔다. 그는 다른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명문대에 다녔던 천재성 있는 친구였다. 그즈음 군에 입대했다. 군에서도 졸병을 면한 뒤로는 기타 연주를 즐겼다. 병장 시절에 중대 장기자랑대회에서 후임과 함께 ‘꿈의 대화’를 불러 포상휴가증을 받고 대학가요제에 나가지 못한 한을 풀었다. 휴가증은 애인과 헤어지게 생겼다면서 새벽녘에 숨어서 혼자 훌쩍거리던 신참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 신참은 애인의 마음을 다시 잡아 내가 제대할 때까지는 군 생활을 잘했다.

제대한 뒤에는 서울 구로에 있는 둘째 형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야쿠르트 배달을 하던 누나가 등록금을 보태주는 것이 미안해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때로는 너무 지쳐 코피가 터지기도 했다. 식당에서 고기불판을 닦기도 했고, 아침 출근시간에는 만원버스에 승객들을 밀어 넣는 ‘푸시맨’ 일도 했다. 버스비를 아끼려고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 다녔다. 점심 값이 없을 때는 친구들 틈에 얻어먹는 게 미안해 아예 학교를 안가기도 했다. 그렇게 1년 동안 악착같이 모으니 통장에 100만원이 생겼다. 당시 대학등록금이 약 60만원, 버스요금이 130원이었다. 100만원은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그리고 암울했던 80년대 그 시절에 해직기자들이 ‘한겨레 신문’을 창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100만원을 거기에 아낌없이 투자했고 ‘주권번호 35610’으로 여전히 주주명단에 남아 있다. 내 삶은 다시 팍팍하고 고단하게 됐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그렇게 촌놈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 젊은 나이에 가업을 물려받은 한 선배가 내게 물었다. “상직아, 가난한 사람에게는 가난한 이유가 있어.” 울컥했지만 뭐라 대꾸하지 못했다. 분해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그 선배에 대한 반감이 컸지만 난 스스로를 봤을 때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결국 그날 밤 나는 20년 뒤 삶에 대한 목표를 세웠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선배의 한 마디는 내게 긍정적인 독기를 품게 했다. 지나고 보니 고맙기까지 하다.

졸업을 앞두고 나는 현대그룹에 지원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도전정신이 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룹 연수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역시 정 회장의 경영철학이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도전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꿈에 도전해보세요. 해 보셨습니까. 안 해 보셨다면 지금 당장 그걸 해보세요.” 그룹연수를 마치고 현대증권에 지원했다. 입사동기 2000명 가운데 20명이 현대증권에 배치됐다. 첫 월급으로 어머니께 빨간 내의를 사드렸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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