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뉴스] 은행, ‘창구’서 나오다 기사의 사진
서울 서초구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8층에 입점한 SC제일은행 ‘뱅크숍’ 전경. 은행이 상점에 입주한 형태여서 ‘뱅크숍’이다. 데스크 2개와 상담실 2곳을 개설해 스마트뱅킹과 자산관리 서비스를 돕는다. 여성 직원이 태블릿을 고객 쪽으로 돌려놓고 금융상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구성찬 기자
은행을 이용하려면 은행원을 만나지 않고, 은행은 방문 않는 게 유리해 보입니다. 초저금리시대엔 스마트폰으로 예금이나 적금에 가입해야 그나마 연 0.1∼0.2% 포인트의 우대금리를 더 받습니다. 은행들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 모바일뱅크를 중심으로 비대면 채널을 강화하기 때문입니다. 알파고 비슷한 로봇이 자산 어드바이저까지 해주는 시대니까요.

그럼에도 한쪽에선 창구를 벗어나 은행원들이 고객을 찾아가는 영업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접점을 늘려가며 인공지능이 대체하지 못하는 서비스로 혁신을 하고 있는 겁니다. 비대면 시대, 대면 영업 강화라는 아이러니입니다. 태블릿을 들고 고객을 찾아 현장으로 들어간 은행을 만나봤습니다.

백화점에 들어간 은행

폭염이 한창이던 지난 8일 오후 2시 무렵 서울 서초구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 들어섰습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인근 거리는 한산했는데. 냉방이 완벽한 백화점 안은 인파 때문에 앞서 나가기 쉽지 않았습니다. 백화점 8층 사은 행사장 바로 옆 SC제일은행 신세계 강남점 뱅크숍을 찾았습니다.

독립 건물을 차지하곤 했던 은행이 지점을 줄이는 대신 백화점이나 마트에 영업점을 내고 있습니다. 백화점처럼 한 달에 한 번만 쉬고, 백화점처럼 주말 공휴일 모두 문을 열며, 백화점처럼 금·토·일엔 밤 8시30분까지 운영합니다. 은행은 잘 찾아오지 않아도 백화점에는 자주 들르는 자산가들을 붙잡기 위해섭니다.

백화점에서 하루에 100만원 넘게 쓰고 사은행사장에서 5만원권 상품권을 받아가는 고객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몇 걸음 옮겨야 하는 모퉁이에서 이 뱅크숍을 마주칩니다. “어, 여기서 카드 결제계좌 바꿀 수 있나요?”라며 자연스레 발길이 이어집니다. 데스크 2개에 상담실 2곳의 단출한 규모지만 예·적금 가입에 카드 발행 그리고 대출까지 됩니다. 고액 자산가를 위한 세무 상담 서비스까지 연결합니다. 실제 스마트뱅킹과 자산관리(PB) 서비스가 동시에 가능한 곳입니다. SC제일은행은 “한국 금융의 뉴월드(신세계)를 선도하는 신세계 뱅크숍”이라고 자랑합니다.

현장 진출 무기는 태블릿

종이가 없는 이곳의 영업은 태블릿 PC가 있기에 가능합니다. 마침 검은 셔츠에 갈색 염색머리의 젊은 남성이 은행 여직원에게 설명을 들으며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하나씩 체크하고 있었습니다. 신분증을 꺼내 태블릿으로 촬영하고, 터치펜으로 자필 사인도 남기고. 이날 이 남성은 통장을 개설하고 인터넷 뱅킹에 가입하고 체크카드까지 만들어 휴대전화에 설치를 마쳤습니다. 백화점 다른 층 매장 직원이라고 밝힌 남성은 “일하면서 수시로 체크하려고 계좌를 만들었다”며 “다른 손님에게도 백화점 안에 은행이 있다고 소개하곤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이패드로 체크카드 개설을 돕던 여직원은 “스타벅스를 많이 이용한다고 하셔서 10% 할인에 포인트 적립이 되는 체크카드를 추천했다”고 했습니다. 태블릿으로 개인정보를 입력하면 혹시 보안엔 문제가 없느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다른 직원이 “아이패드는 저장장치가 아니고 정보 전송장치일 뿐”이라고 답합니다. 아이패드엔 기록이 남지 않고 중앙 데이터베이스 센터로 정보를 보내는 역할만 한다는 겁니다.

은행에 가서 대출 서류를 종이로 만들어 내면 은행은 이걸 금고에 보관했다가 본점으로 실물을 이송해야 합니다. 고객 입장에선 종이 서류에 사인도 여러 곳 해야 하는 데 가끔 직원 실수로 사인이 빠져 다시 은행에 들러 사인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발생합니다. 태블릿은 그런 게 없습니다. 설명을 듣지 않거나 사인을 누락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상품별 조건이나 금리 비교도 훨씬 수월합니다. 은행들이 고루한 창구에서 벗어나 현장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태블릿 영업 시스템 덕분입니다.

애플 지니어스바에서 영감

은행의 이런 영업 방식에 영감을 준 것은 태블릿 PC의 대명사, 아이패드를 만든 애플입니다. 애플의 판매망인 애플스토어, 애플숍 등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스티브 잡스는 생전 “판매보다는 제품을 통한 생활의 향상”을 외치며 직원이 태블릿을 들고 사용자에게 체험을 유도하며 문제를 해결해주는 방식의 매장을 만들었습니다.

리츠칼튼, 포시즌스 등 특급 호텔의 컨시어지 서비스를 배워와 전문 판매인력을 육성했고, 이들이 고도의 응대요령을 지니도록 해 ‘지니어스 바(Genius Bar)’를 만들었습니다. 판매사원이 태블릿과 무선결제로 무장해 문제를 해결하는 전문가로 거듭나도록 한 것입니다.

애플은 알파벳 머리글자를 변형한 서비스 매뉴얼도 만들었습니다. ‘A.P.P.L.E.’ 순서대로 이렇습니다. A는 ‘Approach(접근)’로 개인적이고 따뜻한 인사와 함께 고객을 맞으라는 겁니다. P는 ‘Probe(내사)’, 고객의 필요를 이해하기 위해 정중하게 탐구하라 입니다. 다시 P는 ‘Present(제시)’, 고객이 오늘 집에 가져갈 수 있는 해결책을 제공하란 거구요. L은 ‘Listen(경청)’, 불만이나 건의사항을 경청하란 겁니다. 마지막 E는 ‘End(끝)’, 다시 찾아달라는 인사말로 마무리하란 뜻입니다.

애플의 독특한 리테일 방식이 세계를 뒤흔들자, 버버리와 BMW가 각각 아이패드로 무장한 프로덕트 지니어스 제도를 운영합니다. 은행권에선 뱅크오브아메리카가 디지털 앰버서더란 이름의 서비스를 도입했습니다. 급기야 미국은행연합회(ABA)는 태블릿을 들고 상품 상담을 하는 유니버설 뱅커 자격제도까지 운영하게 됐습니다.

변화의 최일선에서

KB국민은행은 지난 5월 전 점포에 태블릿 기기를 제공한 뒤 태블릿 브랜치 영업을 본격화했습니다. 운영 석 달째, 국민은행 스마트금융부 관계자는 “토지보상금 수십억원을 정기예금으로 약정한 고객이 갑자기 병원에 입원해 지점에 오지 못했다”며 “직원이 병상에 나가 태블릿으로 예금 개설을 마친 경험이 있다”고 했습니다.

앞서 신세계 강남점 뱅크숍을 지휘하는 SC제일은행 조지숙 지점장은 로보어드바이저나 모바일뱅킹 바람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사람 손을 타야 합니다. 투자도 그렇고 대출도 그렇고. 알파고가 아들·딸에게 얼마씩 나눠줄까라는 자산가들의 고민까지 들어줄 순 없습니다. 우리의 찾아가는 서비스가 무모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변화의 촉매제임은 분명합니다. 변화의 최일선에 있습니다. 앉아서 기다리는 게 아니고 먼저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글=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사진=구성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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