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히스토리] ‘GDP 11위’ 한국, 세계 11번째로 잘산다?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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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1위 경제대국.’ 한국을 설명할 때 자부심과 함께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11위의 근거는 국내총생산(GDP). 정말로 한국인이 전 세계에서 11번째로 잘 사는 국민인가와는 별개의 문제다. 지난해 한국인의 1인당 GDP 순위는 세계 28위였다. 특히 행복지수를 놓고 보면 GDP가 과연 의미가 있는지 더욱 의구심이 든다. 유엔에서 지난 3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의 행복도는 조사 대상 157개국 중 58위에 불과했다.

대공황 시절 탄생한 GDP

GDP는 한 국가의 영역 내에서 가계와 기업, 정부 등 모든 경제주체가 일정기간 생산활동에 참여해 만들어낸 최종생산물을 시장 가격으로 평가한 합계다. 1930∼40년대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국가의 생산능력을 파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처음엔 시장이 국내로 제한돼 모든 국민을 기준으로 국민총생산(GNP)이 사용되다 최근(한국은 94년) GDP로 기준이 바뀌었다. 80년 가까이 GDP 내지는 GNP가 국가의 경제규모와 성장속도를 측정하는 척도로서 군림했다.

하지만 경제활동의 축이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옮겨가고, 생산 중심에서 소비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GDP의 신뢰도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확산됐다. 21세기에 들어와 디지털 경제가 발전하면서 GDP의 한계가 더 뚜렷해지고 있다. 페이스북, 구글, 유튜브 등이 무료로 제공하는 서비스는 GDP에 잡히지 않는다. 온라인쇼핑, 모바일뱅킹이 확대되면 시설투자 비용이 늘어 GDP가 오히려 감소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 6월 발표한 보고서에서 공유경제 숙박기업인 에어비앤비가 세계적 호텔 체인인 힐튼월드와이드의 기업 가치에 육박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GDP에 미치는 영향은 계량화하기 힘들다고 했다. 앞으로 인공지능(AI), 로봇 중심의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심지어 부정적인 경제활동도 GDP 증가에 영향을 미친다. 사교육비, 의료비 지출 증가도 GDP 상승분에 반영된다. 환경파괴와 전쟁도 GDP를 높이는 요인이 된다.



반쪽짜리 지표?

일본의 경제성장률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도 GDP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됐다. 일본은행은 2014년 GDP가 556조엔으로 전년에 비해 2.3% 성장했다고 지난달 발표했다. 이는 2014년 GDP가 525조엔으로 0.9% 하락했다는 내각부의 기존 발표와는 정반대다. 어느 수치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아베노믹스의 성패가 확연하게 갈린다. 일본은행은 세금과 소득을 기준으로 계산한 반면, 내각부는 생산과 지출 수치로 GDP를 계산했다.

GDP가 빈부 격차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도 문제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미국 대선의 도널드 트럼프 열풍 배경에는 빈부 격차와 그로 인한 저소득층의 분노가 자리잡고 있는데, GDP로는 이런 현상을 파악할 수 없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5월 “품질 차별화가 가능한 서비스업 비중의 증가, 디지털 경제 확대 등으로 GDP의 신뢰성이 점차 하락하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 이 총재는 “GDP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은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 더 커질 것”이라며 “GDP 통계의 한계점을 보완하고 신뢰성을 제고하겠다”고 했다. 그는 “최근 GDP 전망이 발표될 때마다 관심이 매우 높은데 GDP 0.1∼0.2% 포인트의 차이가 과연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며 GDP에 일희일비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가계 경제가 GDP와 따로 굴러간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한국의 GDP 성장률은 2.6%였는데, 가계소득은 그보다 낮은 1.6% 늘어나는 데 그쳤다. 기업과 정부가 부를 늘려가는 모습을 보며 대다수 국민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상황이다.



GDP의 대안들

프랑스 정부는 GDP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2008년 대통령직속위원회를 발족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가 주축이 된 위원회는 “GDP 숫자에 대한 맹신에서 벗어나 국민 행복도를 반영하는 새로운 지표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위원회는 “양보다 질적 변화가 중요하고 환경·교육·건강을 비롯해 개인의 주관적 만족도가 지표에 반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엔은 소득과 함께 교육 수준, 평균 기대수명 등을 반영한 인간개발지수(HDI)를 매년 발표한다. 2012년 유엔 지속가능발전 정상회의에서는 경제적 부분뿐만 아니라 자연자본까지 국가 자산으로 인정한 ‘포괄적 부(IWI)’라는 지표가 등장하기도 했다. OECD는 2011년부터 ‘더 나은 삶 지수(BLI)’를 발표하고 있는데, 각국의 주거·소득·일자리·건강·안전 등을 두루 평가한다.

2006년 영국 신경제재단이 만든 지구행복지수(HPI)는 사람들이 느끼는 주관적인 삶의 만족도와 기대수명, 환경적 영향을 정의해 지속가능한 발전 정도를 측정한다. 부탄은 72년부터 GDP 대신 국민총행복(GNH) 개념을 사용한다. GNH는 심리적 행복, 삶의 질, 건강, 교육, 지역사회의 활력, 문화 다양성, 생태학적 다양성 등 9개 분야에 관한 상세한 설문조사를 실시해 측정한다.

95년 미국 진보재정의연구소가 개발한 참진보지수(GPI)는 GDP에 포함되지 않는 개인의 소비 지출, 가사노동과 육아, 자원봉사 등을 더하고 범죄나 환경오염, 자원고갈 같은 부정적 요인까지 총 26개 항목을 평가한다. 현재 약 20개국에서 활용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GDP 대체지수 개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통계청은 2014년 ‘국민 삶의 질 지표’를 발표했다. 객관적인 생활조건과 시민들의 인식·평가를 경제지표에 반영하겠다는 취지다. 통계청은 삶의 질 지표를 개선하고 보완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GDP를 대체할 척도가 아직은 마땅치 않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미국 미시간대 경제학 교수인 저스틴 울퍼스는 “GDP가 이론적으로는 결함이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쓸 만한 도구”라며 “GDP가 높은 국가는 사람들이 진정 중요한 일이라 말하는 분야에 있어서도 잘 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폴 시어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GDP를 비판하기는 쉽지만 대체하기는 어렵다”며 “정부가 GDP에 바탕을 두고 경제를 운용하되 더 넓은 측정 기준을 마련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세종=유성열 기자 nukuva@kmib.co.kr, 그래픽=이석희 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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