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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이기수] 신경과서 우울증도 본다고?

비정신과 의사의 항우울제 처방제한 논란… 심평원 약 남용 막으려 기준 바꾼 게 불씨

[내일을 열며-이기수] 신경과서 우울증도 본다고? 기사의 사진
참으로 바람 잘 날 없는 의료계다. 이번엔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를 둘러싼 신경과와 정신건강의학과(정신과)의 밥그릇다툼이다.

뇌졸중, 치매, 파킨슨병, 뇌전증 등 4대 신경질환 관련 학회가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정책토론회를 열고 비(非)정신과 의사들의 SSRI 처방기간을 60일 이내로 제한하고 있는 현행 건강보험 급여 기준을 풀어달라고 정부 측에 요구했다. SSRI는 현재 우울증 환자들에게 가장 많이 사용되는 항우울제다.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2002년부터 급여 기준을 바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제외한 의사들은 SSRI를 60일 이상 처방할 수 없게 하고 있다. 비정신과 의사들에 의한 고가약 과·남용 방지와 함께 보험재정도 보호하자는 취지에서다.

하지만 대한뇌전증학회 등은 이 때문에 치매와 뇌졸중, 파킨슨병, 뇌전증 등 4대 신경질환 환자들의 우울증 치료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홍승봉 대한뇌전증학회장(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은 “정신과 의사는 전체 의사의 3%에 불과하고, 이들이 1년에 볼 수 있는 우울증 환자도 전체 600만여명 중 약 50만명밖에 안 된다”며 “4대 신경계 환자의 우울증이라도 주치의가 적극 치료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정신과 의사들의 반발이 없을 수 없다. 신경과 의사들이 정신과 의사 역할까지 하겠다는 것이냐며 즉각 비판하고 나섰다. “보통 GP가 우울증 환자를 일차적으로 보는 유럽에서도 확실한 우울증 환자 치료는 어김없이 정신과 전문의에게 의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다.” K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로 일하는 한 정신과 의사의 지적이다. GP는 일차 진료의사, 즉 일반의를 지칭한다.

직역 간 갈등을 해소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면 누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 옳은지 먼저 따져보는 게 순서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 항우울제 SSRI 처방권을 둘러싼 시비에선 이런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 항간에서 밥그릇다툼이라고 비난하는 이유다.

개정된 지 14년이나 지나 빛이 바랜 SSRI 관련 급여 기준을 고수하는 심평원도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과거엔 기존 항우울제보다 10배 가까이 비싼 약이라 보험재정 위험 요인이 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값이 많이 내려 그런 우려가 많이 없어진 상황이기 때문이다.

SSRI도 발기부전 치료제 ‘실데나필’이나 ‘타달라필’과 같이 의사라면 필요 시 누구라도 처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람직한 정책 방향이라고 본다.

다만 몇 가지 안전장치가 필요할 듯하다. 환자의 안전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자기 잇속만 챙기려 드는 몰염치 의사는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환자를 볼모로 내가 할 수 있는데도 굳이 정신과로 환자를 보낼 필요가 있는가 하는 태도는 자칫 전문의 제도를 무시하는 오만이자 독선으로 비칠 수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라는 말이다. 치매를 동시에 앓는 퇴행성관절염 환자를 정형외과 의사 혼자만 봐선 안 되는 것처럼 우울증에 걸린 신경계 환자도 신경과 의사 혼자 보려 해선 안 된다. 우울증 전문가인 정신과 의사와의 협진이 꼭 필요하다.

우울증을 합병한 신경계 환자의 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일개 약제의 처방제한 규정을 현실에 맞게 손질하는 것만이 아니다. 치료에 필요하다면 다른 전문가의 머리와 손을 빌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헌신의 자세다.

이기수 의학전문기자 ks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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