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홍덕선 <2> 교회친구들이 불렀던 ‘홍 장로’ 별명이 실제로

유교 집안 부모님 모르게 교회 나가… 붓글씨 소질 발견하고 서예가 결심

[역경의 열매] 홍덕선 <2> 교회친구들이 불렀던 ‘홍 장로’ 별명이 실제로 기사의 사진
홍덕선 장로가 충남 예산농고 2학년에 재학할 때 찍은 증명사진. 홍 장로는 고교 시절에도 붓글씨로 유명한 학생이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시골마을에는 글을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문맹(文盲)이 많았다. 주민 대다수는 농민이었다. 아버지도 농사꾼이었다. 다른 집과 다른 게 있다면 우리 집안이 양반 가문이어서 마을 주민들의 신망을 받았다는 점이다. 동네 사람들은 나를 “도련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갔다. 주민들은 자식들이 전장에서 편지를 보내오면 편지를 들고 우리 집으로 달려와 아버지께 대신 읽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이들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어 답장을 보내는 것도 아버지의 몫이었다.

이처럼 시시콜콜하게 유년기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이런 환경에서 자란 게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른바 ‘유교 집안’에서 자란 덕분에 붓과 먹, 종이는 내게 장난감이나 마찬가지였다. 붓을 가지고 노는 게 일상이었고,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런저런 글씨를 써보며 시간을 보냈다.

서예에 소질이 있다는 걸 실감한 건 금석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붓글씨를 쓰는 시간이었는데, 학급 아이들이 우르르 내 자리로 몰려와 내 글씨를 구경했다. 기분이 좋았고, 붓글씨에 애착을 갖게 됐다.

어느 날인가 교감 선생님이 우리 집에 찾아와 “덕선이는 앞으로 서예가로 대성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기억도 난다. 어떤 어르신들은 나를 “서예 신동”이라고 불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시내에 있는 온양중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서 5분 거리에 있는 곳에서 하숙 생활을 시작했다. 집에서 독립하면서 처음엔 노느라 바빴다. 한때 성적은 전교생 490명 중 485등까지 떨어졌다. 그나마 관심을 가진 분야는 서예였다.

교회에 처음 나간 것도 중학교에 진학하면서였다. 친구 따라 이곳 삼일교회에 다녔다. 부모님은 내가 교회에 나가는지 전혀 몰랐다.

신앙심은 없었지만 친구와 어울려 교회에서 노는 게 마냥 좋았던 것 같다. 만약 그 시절 하나님을 못 만났다면 내 삶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진학한 학교는 충남 예산에 있는 예산농고였다. 예산농고는 당시 전국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학교였다. 충남 지역 관공서에는 예산농고 출신 공무원이 수두룩했다. 예산농고에 합격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고교 시절에는 예산중앙교회에 출석했다. 친구들이 농담 삼아 나를 ‘홍 장로’라고 불렀는데, 실제로 지금 장로가 된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군(郡)이나 도(道)에서 주최한 서예대회에 나가 여러 차례 상을 받았다. 나는 서예가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붓글씨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였다.

고교 시절을 추억하면 1964년 가을 어느 날이 떠오르곤 한다. 당시 3학년이었던 나는 서울에 사는 친척집에 놀러왔다가 경복궁을 찾았다. 때마침 경복궁에서는 서예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대회장 한쪽에 원곡(原谷) 김기승(1909∼2000) 선생의 작품이 내걸려 있었다. 원곡 선생은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예가 중 한 분이었다. 너무 훌륭한 글씨여서 한참동안 작품을 감상했다. 훗날 원곡 선생이 나의 스승이 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