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태원준] 핑계제공法 기사의 사진
김건모는 1994년 ‘핑계’란 곡을 발표했다. 이 노래가 담긴 앨범은 200만장이 팔렸다. ‘내게 그런 핑계 대지마/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로 시작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노랫말이 많은 공감을 얻었다. 실연의 아픔을 노래하면서 떠나간 사람을 이렇게 논리적으로 꾸짖는 곡은 흔치 않다. 사랑하다 떠나는 이유는 딱 하나, 사랑이 식었기 때문인데, ‘혼자 남는 법을 가르쳐주겠다’는 황당한 핑계를 대니 남겨진 이의 분노가 어떨지 짐작이 된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라.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까놓고 말하는 게 얼마나 어려웠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떠올렸겠나. 이 정도 둘러대면 대충 알아들어야 하는데 사랑이란 증상은 행간 읽기 능력을 급격히 감퇴시킨다.

핑계를 찾아내는 탁월함은 정치인만한 사람이 없지 싶다. 정치란 게 사실 끊임없이 핑계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선거에 나서는 이유, 정당을 바꾸는 이유, 정계에 복귀하는 이유를 이런저런 말로 설명하면서 그들은 ‘명분’이라 부른다. 그 설명을 국민이 납득하느냐에 따라 정치인이 찾아낸 핑계는 ‘계산’이 되기도 하고 ‘결단’이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세상 물정은 보통사람에게도 지혜로운 핑계를 요구해 왔다. 돈 꿔 달라는 친구에게는 “나도 어렵다”고 말하는 게 맞는다. 그 말뜻을 못 알아듣는 친구, 그런 핑계도 없이 딱 잘라 거절하는 친구와는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어감이 좀 나빠 그렇지 적절한 핑계가 곧 최소한의 예의인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조만간 시행될 김영란법은 ‘핑계제공법’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청탁, 접대, 금품수수를 금지하고 처벌한다. 고액 뇌물이야 작심하고 주고받겠지만 그렇지 않은 청탁과 접대는 들어주기 싫어도 거절할 구실이 없어서, 부담스럽지만 찜찜해서 이뤄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김영란법은 각종 청탁에 시달리던 공무원, 선생님에게 인사치레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학부모, 천문학적 접대비가 골치 아프던 기업에 좋은 핑계를 준다. 전관예우 관행도 결국 선배의 청탁을 거절할 수 없어 시작된 거였다. 이 법의 핵심은 청탁을 금지한 것보다 거절하기 쉽게 해준 데 있다. 그래도 부정이 오가면 정말 핑계 댈 구석이 없을 것이다.

글=태원준 논설위원, 삽화=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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