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이념은 됐고요, 국정 능력이나 봅시다” 기사의 사진
산업화와 민주화 격동기를 보낸 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가 차례로 들어섰다. 진보 정권 10년에 이어 보수 정권 10년도 거의 끝나간다. 내년에 우리는 새로운 정부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선택에는 기준이 필요한데, 지금까지 정부를 고른 가장 원초적 기준은 이념이었다. 이쪽은 진보 성향이니 복지가 이렇게 되리라는 기대, 저쪽은 보수적이니 안보를 이렇게 해내리란 기대를 갖고 투표장에 갔다. 이 기준은 과연 타당했는가. 대선주자들 움직임이 분주해졌으니 따져볼 때가 된 듯하다.

북한이 5차 핵실험을 했다. 핵무기 버튼을 손에 쥐게 생겼다. 핵확산금지조약에서 탈퇴한 지 23년 만이다. 그 세월 동안 우리는 핵개발을 막으려고 여러 방법을 써봤지만 실패했다. 당근을 주며 친해지려 했고 채찍을 들기도 했다. 정반대 방법을 다 해봤는데 막지 못했으니 방법이 틀려 그랬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의지가 부족했다? 의지를 갖고 일을 해내는 것도 능력이다. 나는 23년간 국정을 맡았던 역대 정부가 안보에 무능했다고 본다. 그 무능함은 북핵에 맞서 “평양 초토화” 같은 말폭탄이나 쏟아내는 군의 모습이 증명하고 있다. 북한의 30배가 넘는 국방예산을 쓰면서 뭘 했기에 대량응징보복(KMPR) 계획은 개념 수준에 불과하다. 북핵은 햇볕정책도 압박정책도 아닌 무능한 정부가 초래한 결과이며, 각각 10년씩 기회를 갖고도 막지 못한 진보 정권과 보수 정권의 합작품이다.

삼성전자 갤럭시 노트7의 배터리가 잇따라 폭발했다는 뉴스에 나는 위기감을 느꼈다. 세상에 이런 일이 하는 황당함도 아니고 멀쩡한 게 왜 터졌느냐는 궁금증도 아니었다. 이 나라 경제가 정말 고꾸라지는 건 아닌가, 아주 거시적인 걱정을 휴대전화 배터리 기사를 읽으며 하고 있었다. 한국 경제에 돈이 도는 곳은 대기업뿐인 현실, 그중에도 독보적 비중을 갖는 삼성의 위치 때문일 것이다. 좀 씁쓸하지 않은가. 일개 기업이 만든 휴대전화가 말썽을 일으켰다고 국가경제를 걱정하는 상황은 결코 정상이 아닐 텐데 그 걱정을 하고 말았다. 몇 안 되는 대기업의 성쇠에 경제가 휘청대는 건 1970년대 재벌 중심의 산업화 구도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오히려 양극화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보수 정권이어서 그런 것도, 진보 정권에선 달랐던 것도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 두 색깔의 정부를 번갈아 거치며 우리 경제는 지금의 모습을 향해 치달아 왔다.

박근혜정부에서 국가 마비 상황을 부른 대형 사건은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였다. 이것이 보수 정권이기에 발생한 일인가. 정부의 위기 예방과 대처 능력이 수준 이하였기 때문이다. 한진해운 법정관리를 결정하면서 세계적 물류대란을 예상치 못한 게 이념적 노선과 무슨 관계가 있나. 그냥 무능한 것이다. 우리는 성장이냐, 분배냐 논쟁을 벌이곤 했다. 보수=성장, 진보=분배의 도식만큼 촌스러운 게 없다. 돌아보면 진보 정권 10년간의 경제성장률이 보수 정권보다 월등히 높았다. 그때는 세계 경기가 좋았고 지금은 나빠서 그렇다? 어차피 세계 경기에 달린 거라면 보수·진보의 이념 따위는 무슨 상관인가. 호황에는 효과를 극대화할 아이디어와 실행력, 불황에는 극복할 아이디어와 돌파력이 필요할 뿐이다.

이념의 잣대는 진영을 만들고, 그것은 일종의 동지적 관계여서 내 편의 무능함을 냉정하게 보지 못한다. 현 정권의 콘크리트 지지층, 친노·친문 세력의 일사불란함이 그 증거다. 다음 정부를 선택할 때는 실물경제 이해도, 동북아 정세 판단력, 4차 산업혁명 통찰력 같은 구체적 기준을 들이대야 우리도 유능한 정부를 가질 수 있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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