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뉴스] 여야 의원들 함께 가꾸는 '생생텃밭' 기사의 사진
국회 헌정기념관 근처 '생생텃밭'에 여야 의원들이 함께 심은 들깨, 오이, 상추, 치커리 등이 잘 자라 수확을 앞두고 있다. 이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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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사당 앞 너른 잔디밭은 '밭전(田)' 자 모양입니다. 국회 본청을 둘러싼 24개의 기둥은 농사 일정을 짜기 위해 조상들이 고안한 24절기를 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지만 국회 안에는 여야 국회의원이 함께 가꾸는 '생생텃밭'이 있습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 모여 살다가 나라를 이룬 민족답게 의원들은 땅에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며 수확의 기쁨을 맛봅니다. 최첨단 스마트폰을 팔아 결국 쌀과 콩을 사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나라에서 여야 의원들은 어떻게 밭을 일굴까요.

백 검사 밭 오이 서리 미제사건

지난 여름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의원은 오동통 살이 오른 자신의 오이를 바라보며 내일이나 모레쯤 따도 되겠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살진 오이는 간데없고 밭에는 빈 가지만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낭패감, 분노와 함께 고개를 들었을 때 마침 더민주 이재정 의원실 보좌진이 눈에 띄었습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부 검사 출신인 백 의원은 특유의 날카로운 촉을 세워 그들을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아무래도 보좌진 손에 들린 새까만 비닐봉투가 심상치 않았답니다. 봉투가 처진 모양으로 미뤄봤을 때 그 속에는 길쭉하면서도 살진 무언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날 오후 이 의원실에 의문의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혹시 오이를 따가셨나요?” 서늘한 목소리에 이 의원실 직원들은 한껏 긴장했습니다. 하지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변호사 출신인 이 의원은 보좌진이 들고 있던 오이는 자신의 텃밭에서 기른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변론했습니다. 수사는 미궁에 빠졌습니다. 전직 검사의 오이를 따간 대도(大盜)는 결국 잡히지 않았습니다.

백 의원은 국회에서 가장 열심히 텃밭을 가꾸기로 유명합니다. 그는 사무실에 찾아온 지역주민과 기자, 민원인들에게 잘 포장한 ‘백혜련표 쌈채소’를 나눠주곤 합니다. 최근에는 밭일이 끝난 뒤 엘리베이터에서 새누리당 백승주 의원을 만나 즉석에서 채소를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백 의원은 “처음에는 모종을 보고 상추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인턴 직원도 있었다”며 “하루하루 자라는 게 신기하니까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물도 주고 따온다”며 밭일의 재미를 설명했습니다.

주민들과 열무 뽑고, 새참 먹고

흰쌀밥에 고추장을 담뿍 넣고 차지게 비빕니다. 새큼한 김치는 국회 텃밭에서 뽑은 열무로 담갔습니다. 텃밭 모임 새누리당 간사인 김용태 의원은 한가한 주말이면 동네 주민들을 불러 모아 밭에서 소일하고 새참을 나눠먹습니다. 지역구인 서울 양천구에서 안양천만 건너면 국회가 있는 영등포구라 들르기 쉽습니다.

김 의원은 주 중에도 한두 번씩 밭을 훑어봅니다. 지난해 배추를 뽑아 김장할 적에는 딸도 밭에 데려와 함께했습니다. 김 의원은 추석 이후 텃밭 모임에서 날을 잡아 김장 행사를 열 계획이라고 알려줬습니다. 밭에서 난 배추로 김치를 담가 국회에서 청소하시는 아주머니와 방호원 등 국회 직원들에게 나눠줄 생각이랍니다. 그는 “밭이라는 게 (작물을) 뜯어 먹는 게 관리”라며 “동네 사람들이랑 밥 비벼 먹고 국회 사람들하고 나눠 먹고 그게 재미있다”며 텃밭 관리법을 귀띔해 줬습니다.

텃밭 모임 야당 간사인 더민주 김현권 의원은 ‘진짜 농부’입니다. 농민을 대변하고자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그는 경북 의성에서 소도 키우고 농사도 짓습니다. 김 의원은 추석을 일주일 앞두고 밭에서 오이와 가지를 한아름 따다가 의원실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프로 농사꾼인 그에게 농사 비법을 묻자 “밭에 출퇴근하다가 들르기도 하고 사무실에서 머리 아플 때 가기도 한다”며 예상 밖의 평범한 답을 내놨습니다. 요령이 아닌 성실함만이 땅과 흙에서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최근 밭에 씨를 뿌린 그는 입구 쪽 땅이 척박해서 걱정입니다. 그래도 밭에 가지와 오이, 깻잎 등이 무성해 한시름 놓았습니다.

새누리당 김용태 의원과 더민주 김현권 의원은 텃밭 모임 여야 간사를 맡고 있는 만큼 밭일을 매개로 서로 가까워 졌습니다. 새누리당 김 의원은 “더민주 김 의원, 그 양반이 진짜 농사꾼이라 밭일하다가 조언을 구한다”며 “그분을 통해 농업현장과 우리가 조금 연결됐단 느낌을 받는다. 당도 다르고 선수도 다르지만 텃밭에서 맺어진 인연으로 정치적 조언도 서로 주고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서리꾼? 서리 손님!

국회 ‘생생텃밭 모임’은 정세균 국회의장이 새정치민주연합(더민주 전신) 의원이던 지난해 4월 여야 국회의원 50여명을 모아 결성했습니다. 국회 헌정기념관 인근에 397㎡(120평) 규모의 텃밭을 조성하고 의원당 5.95㎡(1.8평)씩 330.57㎡(100평)를 경작하고 공동텃밭을 66.11㎡(20평) 크기로 마련했습니다. 정 의장은 “국회에서 만든 텃밭인데 국민들이 좀 따가시면 어떠냐”며 ‘서리 손님’도 반겼다고 합니다.

20대 국회에서는 정 의장과 우윤근 국회사무총장을 비롯해 여야 의원 52명(더민주 36명, 새누리 14명, 국민의당 2명)이 텃밭을 일구고 있습니다. 지난 6월 17일 고추 오이 가지 상추 열무 들깨 치커리 등 모종을 심었고 최근엔 배추를 심어 김장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정 의장은 미국 영부인인 미셸 오바마가 백악관에 텃밭을 조성해 직접 가꾼 채소로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보고 국회에 밭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어렸을 때 화전을 일구고 인삼 농사까지 지어본 그는 당초 국회 대운동장에서 농사지을 계획이었으나 현실적인 이유로 텃밭 규모가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아기자기한 규모 덕분에 도시가 지역구인 의원들도 초보농부로 쉽게 밭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먹거리도 먹거리지만 방문객들에겐 아무래도 아름다운 밭이 ‘포토존’으로 더 이목을 끕니다. 더민주 권미혁 의원은 과감하게 텃밭에 꽃을 심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더민주 문미옥 의원이 조심스레 꽃 세 송이를 따가기도 했답니다. 농사를 전혀 지어본 적 없는 그는 절반의 실패와 절반의 성공을 경험삼아 가을 꽃밭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계획입니다.

고승혁 기자 marquez@kmib.co.kr, 사진=이동희 기자, 그래픽=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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