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윤중식] 경마장과 선착장에서 거울보기 기사의 사진
고려 후기 무신정권 시대의 문인이자 문신인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1168∼1241)의 작품 ‘경설(鏡說)’은 볼수록 새롭다. 이 수필은 작품 속 거울의 독특함을 통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올바른 자세에 대한 깨달음을 표현하고 있다.

거사의 거울은 타인의 잘못된 행동을 곧이곧대로 보고 비판하는 ‘맑은 거울’이 아니다. 그다지 엄격하지 않은 도덕적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흐린 거울’이다. 맑은 거울이 용납되지 않는, 소인배들이 판치는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유연한 처세로 흐린 거울을 선택한 것이다.

작자는 ‘깨쳐 버릴 바에야 먼지에 흐려진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고집하는 이상주의의 태도로 인해 내쳐지는 것보다는 세태를 받아들이는 현실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그는 때를 기다리면 언젠가는 성인과 군자를 만나 자신의 도덕적 이상을 실현할 기회가 올 것이라 믿었다.

백운거사가 세상을 떠나고 57년 뒤에 태어난 유학자인 이곡(李穀·1298∼1351)은 ‘차마설(車馬說)’에서 빌려 탈 때의 감정을 실감 나게 서술했다. 허약한 말을 빌렸을 때는 혹시 그 말이 쓰러져 낭패를 당하기라도 할까 하는 걱정 때문에 아무리 급해도 채찍질하지 않는다. 하지만 튼튼하고 잘 달리는 말을 빌렸을 때는 의기양양하게 마음껏 달리면서 상쾌한 기분을 만끽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곡의 의도는 단순히 말을 타는 데에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은 남에게서 빌린 것이며, 나아가 권력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을 강조한다. 임금의 권력은 백성에게서 빌린 것이고, 신하는 임금에게서 권력을 빌려서 가지고 있는 것임을 역설한다. 이곡은 그 빌린 권력이 너무 크고 많아 그 누구도 그것이 빌린 것에 불과함을 알지 못한다고 개탄한다. 권력이 자기 것이며 영원히 자기 것으로 있을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에 임금은 백성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며 신하는 거들먹거린다는 것이다.

이곡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태어난 권근(權近·1352∼1409)은 태조 이성계의 최고 신하였던 정도전의 뒤를 이어 태종 치하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그의 수필 ‘주옹설(舟翁說)’은 365일 위태로운 배 위에서 생활하는 노인의 삶과 철학을 전달한다.

도대체 왜 노인은 위태로운 배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조그만 배를 타고 물 위에서 지내다가 풍랑을 만나면 목숨을 잃을 것이 뻔한데 말이다. 독자들의 궁금증에 대해 작자는 노인의 대답을 통해 육지가 더 위험하다는 역설을 편다.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을 알면 더 조심하게 되지만 편안한 생활 속에서는 위험을 깨닫지 못하고 방자해져서 자신의 삶을 망치게 된다는 것이다.

노인은 자신의 배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쓰러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것을 늘 명심하고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 조심스러운 삶을 산다고 한다. 하지만 육지에서 편안히 살다 보면 한쪽으로 치우친 삶을 살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것보다 위험이 눈에 보이지 않아 잊고 살아가는 것이 더 위험하다는 노인의 말은, 정말 위험한 것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반성 없이 살아가는 일이라는 뜻이다.

인생살이에 있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스스로 중심을 잡으려는 반성과 삼가는 태도다. 배가 균형을 잃으면 기울어져 물에 잠기듯이 우리도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지 않으면 나태하고 방종한 삶을 살아가다 언젠가 낭패를 겪게 될지 모른다는 교훈을 잊지 말아야겠다.

천고마비의 독서의 계절, 9월의 마지막 주말이다. 경마장이나 유람선을 타고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며 ‘고칠삼현’의 즐거움에 빠져보면 어떨까.

윤중식 종교기획부 부장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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