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황주리의 나의 기쁜 도시] 섬 속의 도시, 그리스 산토리니 기사의 사진
황주리 그림
서른 살 시절의 내게 세상에서 어디가 가장 아름다우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리스의 섬들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중에서도 하얀색의 집들과 파란 지붕들이 그림처럼 빼곡히 모여 있는 그리스 산토리니섬의 풍경을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그건 마치 여행길에서 짧게 만나 좋은 기억으로만 남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 비슷한 거였다.

살아 보니 여행을 하는 일도 사람을 만나는 일과 비슷하다. 두 번 가면 실망스러운 곳도 있고, 아예 살아 보면 훨씬 좋은 곳도 있다. 지금은 흔히들 가는 인기 여행지가 돼 버렸지만, 내가 맨 처음 가본 1990년대 초만 해도 그리스의 에게해 섬들은 달나라처럼 신비로운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 세 번 갔다. 2010년에 두 번째로, 그리고 이태 뒤 산토리니 미술관 프로젝트 일환으로 몇 사람의 화가들과 세 번째 그리스여행을 했다. 가난하지만 때 묻지 않은 풍요로운 여유가 느껴졌던 아테네 사람들의 분위기는 경제 사정이 나빠진 탓인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아테네에서 사람들은 관광객들이야 어찌 되었건 거리 곳곳에서 파업을 부르짖는 시위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도시를 떠나 배를 타고 그 아름다운 에게해의 섬들을 향해 떠나는 마음은 설레었다. 미코노스, 크레타, 중세 도시 로도스섬 등, 산토리니 말고도 너무 많은 아름다운 섬들로 이루어진 그리스의 섬들에 가는 일은 늘 설렐 것이다. 문득 일 년에 반은 그리스의 섬에서 살며 글을 쓴다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부러워졌다.

우리 일행은 드디어 산토리니섬에 도착했다. 유람선에서 내려 케이블카를 타고 피라 마을에 올라 다시 버스를 타고 한없이 구불거리는 높은 언덕을 올라갔다. 바다를 끼고 올라가는 섬의 풍경은 척박하고 한없이 넓었다. 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화산재가 쌓인 황량한 풍경을 한없이 지나 그림 같은 ‘이아마을’에 당도한다. 에게해의 사백 개 넘는 섬 가운데 가장 매혹적인 섬 중 하나인 산토리니의 ‘이아마을’은 4000년 전 화산폭발 때문에 절벽이 된 가파른 땅 위에 하나둘 집을 짓기 시작해 하얗게 채색된 꿈 속 같은 마을 풍경을 이룬다. 하얀 미로 같은 골목들을 헤매며 예쁜 기념품 가게들을 구경하고, 노천카페에 앉아 에게해를 닮은 푸른 하늘을 지치도록 바라보다 일몰의 시간을 기다리는 일은 행복하다. 흰색마을이 붉게 물드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 맥주 한잔 마시며 집에서부터 가져온 근심 걱정을 모두 내려놓는다. 이제는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한 상업화된 곳이라 해도, 누구에게나 산토리니의 일몰은 여전히 나만의 일몰이다. 해가 지면서 하얀 집들에 조명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타이밍은 마치 다른 세계로 전환되는 느낌이다.

아쉬운 건 하얀 집들과 푸른 하늘의 배경에 검은 옷을 입은 할머니의 실루엣이 겹쳐진 독특한 풍경은 볼 수 없었다. 오래전 그리스 섬에서 마주쳤던 검은 옷의 할머니들은 다 돌아가시고 한 명도 남지 않은 듯했다. 검은 옷에 검은 머플러를 한 등이 굽은 할머니들과 찍은 사진이 지금도 남아있다. 왠지 돌아가신 할머니를 찾아 헤매듯 나는 검은 옷을 입은 할머니들을 찾아다녔지만 보지 못했다.

세 번을 가도 골목골목마다 미로로 이어진 이아마을의 골목길을 나는 사랑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소재를 찾아다녔다. 예전에 짧게 왔다갈 때는 아쉬워 자꾸만 뒤돌아보던 풍경이었다. “하루만, 아니 한 시간만 더 머무르게 해다오.” 그런 기분이 들 만큼 못내 아쉽던 산토리니의 풍경이 한 열흘 머물며 일상이 되어갔다. 기념품 가게를 들어가는 일도 시들해졌고, 일몰의 아름다움도 일상이 되어가며, 나는 슬슬 섬에서 머무르는 일이 지루해졌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나는 마을의 골목들을 하루에도 수십 번 배회하며 산토리니식 계단들을 스케치했다. 그러다 그곳에 사람 다음으로 많은 당나귀들에 눈이 멈췄다. 항구에서 마을까지 사람을 태우고 하루에도 500개 넘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당나귀들을 바라보며 나는 매일 당나귀를 그렸다. 문득 ‘프란시스 잠’의 이런 시구절이 떠오르던, 이제는 또 먼 과거가 되어버린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당나귀가 나는 좋아. 물푸레나무 긴 울타리를 끼고 걸어가는 순한 당나귀가 나는 좋아.-가난한 사람들을 태워주기도 하고 호밀이 가득 든 부대를 나르기도 한다. -내 사랑은 당나귀를 바보로 안다. 어쨌든 당나귀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측은한 당나귀는 너무나 일을 많이 한다. 당나귀에게 물어라. 나의 소녀야. 내가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를 -당나귀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당나귀는 어두운 그늘 속을 착한 마음 한 아름 가득 안고서 꽃핀 길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황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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