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송세영] 삶과 신앙의 일치 기사의 사진
서울 변두리 개척교회 목회자의 장남으로 태어나 가난했지만 신앙 좋은 청년이 있었다. 공부를 잘했지만 집안 형편과 동생들을 생각해 전액 장학금을 주고 취업까지 보장해주는 전문대에 입학했다. 졸업 후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힘 있는 곳에 발령을 받았다. 장남으로서 집안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벅찬 감격에 부풀어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2년 만에 사표를 쓰고 말았다.

그에게 삶과 신앙은 하나였고 세상 속 빛과 소금으로서의 삶은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었다. 하지만 첫 직장은 부패가 만연한 곳이었고 나 홀로 깨끗한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상납과 분배를 통해 모두를 한패로 만들었다. 그가 끝내 공범이 되는 것을 거부하자 노골적으로 배척하며 사표를 쓰도록 내몰았다.

오래전 있었던 이야기이지만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의 고민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취재 현장에서 만난 크리스천 공무원이나 기업체 간부 중에도 이 같은 고민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 중에는 원칙을 지키면서 고위직에 오른 사람도 드물게 있었다. 직장 회식에 빠짐없이 참석하면서도 한 잔의 술도 마시지 않았다는 차관급 공직자는 고위직에 오른 비결을 묻자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고 또 일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인정을 받은 건 행운일지 모른다. 다수는 고지식한 인간으로 치부돼 불이익을 받거나 죄책감을 안고 적당하게 타협하며 살아간다. 타협을 거듭하다 도덕감각까지 마비되면 교회엔 출석하지만 신앙은 잃어버린 허울뿐인 크리스천으로 전락하곤 한다. 비신앙인보다 더한 타락의 길로 빠져드는 이들도 간혹 봤다.

일터 사역자들이 많이 상담하는 주제 중 하나도 ‘직장에서 일하며 향응성 접대나 불의한 일을 요구받을 때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하면 좋은가’라는 문제다. 일을 하면서도 크리스천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집단따돌림을 당할 수 있고 심하면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 가족의 생계까지 걸려 있다면 때론 순교에 가까운 결단을 해야 할 때도 있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인데도 북한만큼이나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있다. 국가권력이 종교인을 탄압하거나 지배적인 다른 종교가 있어 박해를 가해서가 아니다. 한국사회에 만연된 부정부패와 거짓, 청탁과 접대, 패거리문화가 크리스천들에겐 심각하고도 중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국민일보 미션라이프는 김영란법 시행에 즈음해 교계에 적용될 수 있는 사례별 Q&A를 연재하고 있다. 이 법안에 대한 찬반 입장을 떠나 독자들의 반응은 열렬하다. 공무원과 언론인, 교직원에게만 해당되는 줄 알고 있던 많은 독자들이 스스로를 점검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이처럼 김영란법의 구체적인 조항과 사례, 적용 여부를 아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선의로 한 행동이 불법과 불의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법이 갖고 있는 시대적 함의와 메시지다.

한국교회가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점은 교회가 아닌 세상이, 교회보다 앞서 이 같은 변화를 추동하고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근대화와 민주화를 선도해왔는데 어느 순간부터인지 세상에 뒤처지고 있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걱정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한국교회가 사회의 변화를 선도하지 못하게 된 것은 좋은 게 좋다는 타협, 세상살이는 다 그런 것이라는 핑계와 자기합리화에 익숙해졌기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실망하긴 이르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삶과 신앙의 일치를 가로막던 걸림돌은 대거 없어질 것이다. 세상 속에서 핑곗거리를 찾는 것도 쉽지 않게 됐다. 김영란법은 그래서 삶과 신앙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참 크리스천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개혁과 갱신을 추구하는 한국교회에 커다란 축복일 수 있다.

송세영 종교부장sysoh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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