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강창욱] 지하철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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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만원 지하철 객차 안에서 나는 매일 한 줄기 콩나물이 되어 여의도로, 서대문으로, 광화문으로 실려 간다. 이 비정한 공간은 일말의 직업적 사명이나 자부심, 일의 보람 따위를 비웃으며 돈벌이의 당위나 목적까지도 잊게 만들고 날마다 같은 시간 같은 곳으로 동원되는 한낱 노역자로서의 신세만을 각인시킨다. 나는 이런 왜소함을 견딜 수 없어 하면서도 저항할 수단과 방법은 찾지 못한다. 그 상태로 열차가 철로를 타고 터널을 통과하는 소리, 에어컨이 일정 주기로 가동하며 바람을 내뿜는 소리, 이번 정거장과 다음 정거장을 차례로 안내하는 소리를 한꺼번에 듣고 있으면 어떤 공정의 각 단계를 거치는 공산품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다 곳곳에서 새어나오는, 서로가 서로를 불편해하는 소리를 듣고 나면 그제야 모든 승객이 저마다의 감정과 인격과 삶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

하루 이틀 얘기가 아니지만 이른 아침 서울 지하철 9호선은 콩나물시루다. 이 시루가 얼마나 빽빽한지 다른 콩나물들과의 거리를 도무지 벌릴 수 없고, 그렇다고 누구도 좁히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 어쩔 수 없는 상태라도 유지하려면 온몸에 힘을 주고 버텨야 하는데 문이 열릴 때마다 터진 제방처럼 모두가 무너지고 만다. 쏟아져 나가는 사람들과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로 열차 안은 소용돌이친다. 지난여름 임신부였던 선배 기자는 ‘지하철 무용담’이라는 제하의 글에서 비유어인 ‘지옥철’에 따옴표도 치지 않고 9호선 지옥철이라고 썼는데 거기엔 저 악명이 승객들에게는 과장한 비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라는 일갈이 있다. 분명 출퇴근시간 9호선은 임신부나 노약자가 타서는 안 되는 열차다.

이런 열차 안에서 남자라면 두 손이 누군가에게라도 보이는 곳에 두는 것이 좋다. 행여 치한으로 오해받을 때 이 ‘매너손’은 결백을 증언해줄 것이다. 몸에 힘을 주고 매너손을 한 채로 내 앞에 등 돌리고 선 여자들의 뒤통수를 하는 수 없이 바라보게 될 때가 있다. 몸을 그대로 두고 고개만 옆으로 돌리고 있으면 이상하니까 정면을 그냥 본다. 움직이지 않는 여자의 뒤통수는 왠지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가르마 사이로 하얗게 드러난 정수리를 내려다보면서 대머리가 된 여자를 상상하고, 날갯죽지까지 늘어뜨린 머리칼을 보면서는 그 긴 다발을 무대 위 커튼처럼 열어젖히고 뒤통수에 달린 제2의 얼굴을 내보이는 상상을 한다. 그 얼굴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웃는 얼굴이 더 무서울 것이다.

농담 같은 상상을 하며 남자들과 여자들 간에, 좁지만 기어이 벌어져 있는 거리를 재고 그들의 얼굴을 살핀다. 가장 가까운 얼굴 간의 거리는 30㎝도 안 될 때가 많다. 나는 내 가족의 얼굴도 이렇게 가까이서 보지 않는다. 이런 거리에서는 남자 볼에 대충 발린 선크림과 여자 코밑에 난 수염이 보인다. 형광등 불빛이란 아무래도 너무하다. 이 적나라한 조명에 드러난 표정이 사막 같기는 남녀가 다를 게 없다. 좋을 리가 없지. 일하러 가는 거니까. 이 시간 이런 곳에서 해바라기 같은 미소를 짓는 사람은 눈길을 끌 것이다.

인파 속에서 딱 한 번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다.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짐작되는 여자였는데 왜인지 활짝 웃고 있었다. 나를 보고 웃는 게 아닌데도 설레었다. 그 미소로 나를 겨냥했다면 나는 분명 착각에 빠져 허우적댔을 것이다. 왜 웃었을까. 주변에 그 미소를 받을 상대는 없어 보였고 여자가 스마트폰을 보던 중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가만히 있다가 그냥 활짝 웃었다. 꽃이 누군가를 위해 피는 게 아니어서 인적 없는 황야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만발하듯이. 그의 내부에서 벌어진 심리 작용이 무엇이었든간에 미소가 근사해서 계속 훔쳐보게 됐다. 열차가 멈추고 승객들이 토사물처럼 쏟아져 나갈 때 여자는 사라졌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말도 없이 서로 온몸을 갖다 붙이는 장소는 요즘 세상에 지하철이나 버스밖에 없을 것이다. 버스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운전사와 승객이 마주할 수 없는 지하철은 더욱 무정해서 그 내부 사정이 어떤지는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삽으로 흙을 퍼 담듯 승객을 태우고, 퍼내듯 덜어내며 저편으로 계속 달린다. 그런 지하철을 타고 있으면 이윤에 목매 직원들을 닦달하는 자들의 소리가 들린다. 그러다 사고가 나면 운전사나 정비사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 이제껏 봐온 모습이다. 29일 밤 열차 밖의 일인 서울 지하철 파업 관련 기사를 보면서 나는 자꾸 사람으로 가득 찬 객차 안의 풍경만 떠올랐다. 글=강창욱 산업부 기자 kcw@kmib.co.kr, 삽화=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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