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박형준] 정치는 죽었다 기사의 사진
일방통행, 막말, 오기, 파업, 폭로. 지난 열흘 한국 정치는 이미 질렸던 그 ‘진상 정치’의 장면들, 더는 보고 싶지 않은 그 필름을 또 돌렸다. 그것도 협치를 합창했던 20대 첫 정기국회에서. 정치인이란 배우는 때로 역사의 무대에서 의식하지 못하고 악역을 수행한다. 역설적으로 그를 통해 큰 구조 개혁의 당위성, 그 시급함을 입증해주곤 한다.

비정상 한국 정치에 대한 불신은 갈 데까지 갔다. KDI의 사회적자본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은 처음 만난 사람보다 정부를 더 못 믿고, 국회는 그보다 더 못 믿는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두 기둥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셈이다. 최근 사태에 그 이유가 다 들어 있다.

우선 민주주의 퇴행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민의를 중심에 두는 것이다. 업무를 막 시작한 장관을 해임하라는 민의가 있었나? 국정감사 거부하라는 민의가 있었나? 민의와 관계없이 자기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 대의제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국민의 의사와 위임 의사 사이의 괴리가 넓어지는 데서 온다.

역사상 처음으로 해임건의안을 거부한 대통령 역시 민주주의에 나쁜 선례를 남겼다.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대통령은 의회의 위에 있을 수 없다. 국민 권력은 의회에 있다. 이 정부 들어 유독 국회 결정이 자주 비토되는 것(그것도 정책이 아니라 인사나 행정부 권한을 위해)은 민주주의의 퇴행을 알리기에 충분하다.

다음으로 정치의 왜소화다. 정치의 본질은 의사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떤 의사를? 나라 공동체가 직면한 도전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의사를. 그런데 여야가 싸우고 있는 쟁점 중 ‘국정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없다. 생존이 걸린 북한 핵 위기, 지진과 원전 불안에 대한 영남권의 집단 공포감, 노동개혁의 절박함을 반증하는 기득권 노조의 파업, 재벌 수직계열화가 가져온 폐해인 ‘노트7 배터리 문제’, 110조원의 돈을 쓰고도 전혀 개선되지 않는 저출산 문제 등 나라의 명운이나 미래와 관련된 쟁점들은 다 흘러가버린다. 중요한 어젠다는 밀려나는 대신 골목 말다툼 수준의 쟁점을 가지고는 지독히 싸운다. 참을 수 없는 정치의 가벼움이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라고 국민들이 만들어준 의회가 ‘의사’도 ‘결정’도 없는 상태로 전락하고 있다.

끝으로 품격의 상실이다. 정말 지금 하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이 배울까 겁난다. 민주주의의 수준은 책임과 윤리를 갖춘 시민의 품격과 비례한다. 국민의 대표는 이 시민의 품격을 선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헌데 ‘신사의 품격’은커녕 상스러움이 넘쳐난다. 반말과 욕이 난무하는 본회의장과 의총장을 본 것은 어제오늘이 아니다. 사법적 행위가 아니라 정치적 행위로 풀라고 일을 맡겨놓은 곳이 국회인데 툭하면 형사 고발이다. 폭로의 수준도 낯 뜨겁다. 자살률 세계 최고인 나라에서 생명 존중의 기풍 조성은커녕 자살 위협이나 다름없는 ‘밥 굶기’를 투쟁의 무기로 삼는 것도 이젠 구태다.

지금 대한민국 현실을 보면 교차로에서 모든 방면으로 차가 꽉 막혀 움쩍달싹하지 못하는 형국이다. 그런데 정치가 이 막힌 길을 뚫기보다는 더 막는 기능을 한다면 ‘정치는 죽었다’고 선언해야 한다.

이 죽어가는 정치가 사람의 문제인가, 제도의 문제인가? 물론 둘 다다. 소통, 공감, 협치의 미덕을 갖추지 못한 대통령도 문제지만 ‘적대의 정치’를 일상화하는 5년단임제의 문제를 비껴갈 수 없다. ‘소명으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으로 권력을 누리려는 국회의원이 다수인 것도 문제지만, 공천을 보스 마음대로 하는 비민주적 정당 제도와 지역주의와 ‘골목 정치’에 매몰되게 만드는 소선거구제가 더 큰 문제이다.

개헌이나 정치제도 개편 주장에 사람이 문제지 제도가 뭐가 문제냐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답해야 한다. 우리가 30년 실험한 제도에서 6명의 대통령이 똑같은 문제를 보이고, 정치가 지속적으로 ‘질적 저하’를 보여주는 이 현실이 오직 사람을 잘못 뽑아서인가? 아니다. 한국 정치에도 훌륭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도 제도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사람도 바뀌어야 하지만 제도가 바뀌어야 사람이 바뀔 수 있다.

제도 개혁은 문제가 드러난 제도를, 문제를 해소할 확률이 높은 제도로 바꾸는 것이다. 물론 개혁은 고통도 수반하고 부작용도 수반한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까? 개헌을 포함해 근원적인 정치개혁이 없다면 우리는 이 지겨운 정치를 계속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위기를 붙잡는 ‘교차로의 정체’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박형준(동아대 교수·전 국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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