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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가습기 살균제=폐 섬유화’ 고집… 치료비 지원 안해

3·4등급 피해자들 치료비 없어 삶의 구렁텅이 빠지는데…

정부 ‘가습기 살균제=폐 섬유화’ 고집… 치료비 지원 안해 기사의 사진
2011년 11월 가습기 살균제가 얼마나 인체에 치명적인지를 보여주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질병관리본부는 1차 동물흡입 실험 최종 결과를 발표하고 "가습기 살균제 성분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염화에톡시에틸구아니딘(PGH)과 폐 섬유화 사이 인과관계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질병관리본부의 실험 결과는 가습기 살균제를 쓴 뒤 '알 수 없는 이유'로 시름시름 앓고 있거나 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한 줄기 빛이었다.

그러나 이게 양날의 칼이 됐다. 정부는 질병관리본부의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가습기 살균제 피해는 ‘폐 말단 기관지’에서 ‘소엽 중심성’(폐가 부분적으로 파괴되는 것)으로 딱딱해지는 ‘섬유화’가 나타날 경우로만 한정했다. 이 때문에 지난달 24일 사망한 김연숙(41·여)씨의 경우 폐섬유화는 나타났지만 다른 조건이 부합하지 않아 피해를 인정받지 못했다. 정부는 피해조사를 거쳐 김씨를 ‘4등급 피해자’로 분류했다. 폐 섬유화를 제외한 폐 질환, 호흡기 질환 등을 앓던 환자들은 3, 4등급으로 판정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다른 가습기 살균제 성분인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론(CMIT)/메틸이소티아졸론(MIT)과 폐 손상 사이에 관련이 없다는 결론을 내놓으면서 이 성분이 들어간 가습기 살균제를 썼던 피해자들은 기댈 곳조차 없게 됐다.

3, 4등급 피해자 ‘연관성’ 없나

전문가 사이에서 정부의 피해 판정 기준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부가 임상실험 없이 동물실험만으로 판정한 방식과 기준이 과학적이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덕환 서강대 과학커뮤니케이션 교수는 6일 “동물실험 결과가 임상실험 결과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은 과학의 기본”이라며 “임상실험이 없는 상태에서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피해 정도를 봐야하는데 정부가 너무 제한적으로 기준을 정했다”고 말했다.

특히 CMIT/MIT 성분이 포함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고 발생한 피해를 가습기 살균제와 무관하다고 판단한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 성분이 들어간 가습기 살균제를 쓴 피해자에겐 폐 섬유화보다 폐렴 등 다른 호흡기 질환이 더 많이 나타났다. 이 때문에 피해자 대부분이 3, 4등급으로 분류됐다.

그러나 화학물질의 입자 크기를 따져보면 당연한 일이라는 의견이 나온다. PHMG, PGH는 입자 크기가 200나노미터인 반면 CMIT/MIT는 20나노미터에 불과하다. 상대적으로 입자가 큰 PHMG 등은 ‘폐포(폐 속에서 공기 교환이 이뤄지는 작은 기관)’에 계속 남아 염증을 일으킨다. 염증이 반복되면서 폐 섬유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다. 반면 입자가 작은 CMIT/MIT는 폐에서 잠깐 염증을 일으키고 혈액으로 넘어가 다양한 기관에서 질환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가습기 살균제=폐 섬유화’ 공식 깨야

이 때문에 가습기 살균제가 폐 섬유화만 일으킨다는 결론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이미 CMIT/MIT가 호흡기 질환, 피부염 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보고서는 여럿 있다. 지난 1998년 미국 환경청은 ‘MIT 재등록 가능성 검토 보고서’에서 MIT를 중장기적으로 흡입하면 비염이 발생한다고 밝혔다.

지난 2000년 CMIT/MIT에 노출됐을 때 호흡기 등에 문제가 생긴다는 연구도 발표됐다. 해당 성분이 보존제로 포함된 수성페인트를 바른 집에서 지냈던 사람에게서 1∼4일 내에 알레르기성 피부염과 호흡곤란 증세 등이 나타났다. ‘3, 4등급 피해자 모임’ 대표인 이은영씨가 3, 4등급 피해자 증세에 대한 자료를 수집·분석한 결과 비염, 천식, 부비동염 등이 주로 나타났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애초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 조사를 하면서 적은 수의 피해자를 대상으로 하다 보니 피해기준을 소극적으로 세웠다”며 “현재의 피해 등급과 판정 기준을 증상의 정도 등에 따라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윤성민 기자 woody@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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