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직격 인터뷰-이만수 前 SK 감독] “야구 불모지 라오스에 수년째 야구 기본기 가르쳐요” 기사의 사진
이만수 전 SK 와이번스 감독이 12일 서울 영등포구 국민일보 편집국 회의실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라오스 야구 전도사’로 활동하는 근황과 자신의 야구철학 등을 설명하고 있다. 최종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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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전 인천 문학야구장에서 ‘팬티만 입은 사나이’가 달리던 기억이 난다. 바로 이만수 전 SK 와이번스 감독이다. 수석코치 시절 홈구장 관중들이 경기장을 찾지 않자 “이번 시즌 만원사례가 되면 팬티만 입고 경기장을 달리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세리머니였다.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안타를 친 선수, 최초의 타점, 최초의 홈런을 친 선수가 바로 이 전 감독이다. 수차례 홈런왕 타점왕에 올랐고 통산 타율도 3할에 가깝다.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30년을 달려온 이만수 전 감독을 12일 국민일보 편집국 회의실에서 만났다. ‘요즘 대체 뭘 하고 지내는 걸까’ 궁금해서였다. ‘그토록 예찬받던 스타플레이어가 수많은 프로구단 코칭스태프 명단에 왜 이름도 올리지 못할까’ 궁금해서였다.

이 전 감독의 현 직책은 한국프로야구협회(KBO) 육성부위원장이다. 유망주를 발굴하고 아마추어 선수를 육성하는 직책이다. 매년 야구부가 있는 전국 초·중·고교 40여 군데를 돌며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그보다 더 큰 일은 야구 불모지인 라오스를 찾아가 야구를 심고 있다. 현역 시절부터 늘 유쾌했던 그는 이날도 웃음 가운데 자신의 근황을 털어놨다.

-요즘 뭘 하고 지내시나.

“재능기부를 하고 있죠. 작년에만 40군데 학교를 찾아 야구를 가르쳤다.”

-어떤 일로 시작하게 된 건가.

“나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말씀처럼 현역 때도 재능기부를 많이 했지만, 전혀 주변에 안 알렸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을 보니까 ‘이만수가 돈도 많이 벌었으면서 봉사도 안 한다. 스타라고 어깨 힘이 들어갔나’는 기사가 있었다. 안 되겠구나 싶어 고등학교 시절부터 해오던 일을 조금 알린 것뿐이다.”

-라오스에서는 야구 전도사로 알려져 있다.

“2013년 시즌을 마치고 라오스에 사는 지인에게 연락받은 게 계기가 됐다. ‘시즌 끝나면 재능기부 좀 해 달라’고 해서 건성으로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계속 전화가 와서, 2014년 시즌 때 선수들한테 더러워진 유니폼 버리지 말고 다 가져오라 해서 모자 양말 허리띠 야구화 등을 5박스 보냈다. 4월에는 자비로 야구 장비를 사서 1000만원어치 보냈다. 그때까지도 지인 생각에 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시즌 끝나고 2014년 11월 12일 라오스에 갔다. 근데 야구 하겠다고 모인 학생, 청년들이 전부 바싹 말라 있더라. 신발조차 없어 맨발로 온 아이도 있었다. 그냥 보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돌아와 팬과 지인들 찾아가서 취지를 얘기하고 장비 살 돈을 모았다. 제 팬클럽 이름이 ‘포에버(Forever) 22’인데 야구 유니폼 60벌을 맞춰서 보내주더라. 그게 지금 라오스팀 유니폼이 됐다.”

-라오스 야구는 어느 수준인가.

“동남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다. 마음 놓고 야구하게 하려면 장학금이라도 줘야겠다고 생각해 재단 설립을 추진했다. 그런데 돈 많은 기업, 사업가들 찾아갔더니 거절하더라. 현직에 있을 때 그렇게 따뜻했던 사람들이 라오스 돕는 일도 해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세상이 참 냉정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데 제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하니까, 그 사람들이 다 바뀌더라. 5개월 하니까 한 명 두 명 전화가 오고, 6개월 되니 도와주더라. 지난 4월 ‘헐크 파운데이션’을 만들었다.”

-크리스천으로서의 사명감이었나.

“늘 신앙인으로서 바른 삶이 뭔지 떠올린다. 2014년 퇴직했을 때 처음엔 라오스가 아니라 동유럽에 집사람과 둘이서만 밀월여행을 가려고 했다. 늘 고생만 시킨 아내에게 푹 쉬는 여행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근데 아내가 ‘당신은 감독할 때 라오스를 돕겠다고 해놓고 이게 뭐냐’고 면박을 주더라. ‘하나님 믿는 사람으로서 자기가 한 약속도 안 지키느냐’는 말이었다. 정신이 번쩍 났다.”

-거의 사비를 들이다시피 라오스 야구를 챙기는데, 지금까지 성과는 어떤 게 있나.

“서울대 야구동아리가 정말 많은 도움을 줬다. 라오스까지 따라와 행정 문외한인 저를 도와 라오스 정부와 협조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도록 도와주고, 우리 정부와 라오스 정부를 직접 연결해 지도자 파견까지 성사시켰다. 스포츠 브랜드인 데상트는 라오스 야구 대표팀에 11억1000만원어치의 야구용품을 무상으로 보내줬다. 8월에는 라오스 대표선수들을 부산시 국제교류재단이 초청해 부산을 방문했다.”

-감독님의 야구 인생에 대해 여쭤 보고 싶다.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였나.

“한국 프로야구 첫 안타, 첫 타점, 첫 홈런을 기록했을 때다. 1982년 3월 27일 프로야구가 출범해 예전 동대문야구장에서 벌어진 첫 시합이었다. 그리고 거의 15년 이상 선수 생활을 했고 포수 포지션을 지켰다. 포수를 하면 늘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 전체를 볼 수 있다.”

-미국 메이저리그 코치로 지도자 연수를 했는데, 그땐 어땠나.

“한국이나 일본은 동양 특유의 연장자 문화가 있다. 근데 미국에 갔더니 마이너리그 스무 살짜리 타자 녀석이 마흔이 넘은 내 머리를 툭툭 치며 악수를 청하더라. ‘내가 그래도 대한민국 홈런왕이었는데’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바꿨다. 영어도 잘 못해 정말 가자마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수년을 더 미국에서 보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마이너리그 팀 코치 시절이었다. 주루코치로 게임에 나갔는데, 제겐 진짜 오랜만의 기회였다. 계속 ‘파이팅’을 외치고 한국말로 ‘잘 쳐’ ‘잘했어’ ‘더 열심히’ 등등 떠들면서 잠시도 멈추지 않고 소리를 질렀는데 주심이 갑자기 ‘유, 겟 아웃(You, get out)’을 외치더라. 퇴장당한 거다. 그래서 항의를 했다, 한국말로. ‘왜 내가 퇴장이냐, 잘못한 것도 없는데’라고 했더니, ‘당신은 너무 시끄러워, 나가’라고 하더라. 대판 싸웠다. 우리 팀 이기라고 고함지른 게 무슨 잘못이냐고. 팬들이 박수치고 날 응원해주고, 경기장은 웃음바다가 됐다. 그런데 다음 날 클리블랜드 단장이 ‘정말 고맙다’며 찾아왔더라. ‘이렇게 파이팅 넘치는 분이 우리 선수들의 야구정신을 일깨웠다’고 하더라. 그때부터 내 인생 모토이자 야구 모토는 ‘네버 에버 기브 업’(Never Ever Give up·절대 포기하지 않는다)이 됐다.”

-삼성 팬들 가운데는 삼성 감독으로 부임하길 기대하는 사람이 많다.

“류중일 감독은 삼성의 한국시리즈 4연패를 이룬 유능한 지도자다. 이번 시즌이 힘들었다고 지도자를 바꿀 이유가 없다. 저는 라오스에 대한 꿈이 있다. 앞으로 20년 동안 야구장도 짓고, 학교도 짓고 싶다. 1904년 미국인 선교사가 한국에 야구를 보급했고, 한국 야구가 이만큼 성장했다. 저도 라오스에서 그런 주춧돌을 놓고 싶다.”

글=신창호 스포츠레저팀장 procol@kmib.co.kr, 사진=최종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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