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노석철] 세탁기 몰카 사건과 갤노트7 기사의 사진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삼성 이건희 회장이 던진 ‘신경영 선언’과 관련해 늘 회자되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그룹 사내방송인 SBC의 이른바 ‘세탁기 몰래카메라’ 사건이다. 생산라인에서 작업자가 세탁기 뚜껑 부분의 플라스틱 부품 규격이 맞지 않자 칼로 깎아 맞춘 뒤 조립하는 장면이었다. 뚜껑이 맞지 않으면 부품을 새로 주문받아 작업해야 하는데, 당시엔 그럴 시간도 없고 그렇게 해도 별 문제없이 지나가니 그랬던 모양이었다. 이 회장은 그걸 보고 “지금이 도대체 어느 시대인데 그런 짓을 하느냐”고 크게 질책했다고 한다. ‘자식과 마누라만 빼고 다 바꾸자’던 이 회장 입장에서 얼마나 어처구니없었을까.

이 회장은 곧바로 그 세탁기 생산라인 가동을 중지시키고 ‘품질 경영’에 시동을 걸었다. 불량이 생기면 즉시 라인을 세우고 문제 해결 시까지 가동하지 않는 ‘라인 스톱제’도 도입했다. 그래도 품질 문제는 풀리지 않는 숙제였던 모양이다.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선 삼성전자 제품을 불태우는 화형식이 있었다. 임원들에게 돌린 휴대전화조차 통화가 잘 안 되는 불량품이란 게 발단이었다. 이 회장은 “아직도 휴대전화 품질이 그 모양인가. 돈을 받고 불량품을 팔다니 고객이 두렵지도 않나”라며 대노했다고 한다. 20여년 전 시작된 품질 경영이 오늘의 ‘글로벌 삼성’을 만들어낸 것이다.

최근 잇따르는 갤럭시 노트7 발화 사건으로 품질 경영이 다시 도마에 오른다. 삼성 내부에서도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자조가 나온다. 업계에선 ‘과도한 실적주의가 품질 문제를 초래했다’거나 ‘목표에 집착하는 속도전에 과부하가 걸렸다’는 등의 분석을 내놓고 있다. 노트7 사건은 단순한 공정상 실수일 수도 있고, 그동안 삼성 내부에 쌓여온 ‘자만심’이 부른 대형 사고일 수도 있다. ‘배터리 결함이냐. 다른 시스템 오류가 있느냐’의 기술적인 원인 규명은 곧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다만 단순히 기술이나 공정상 오류가 아니라면 문제는 간단치 않다. 예를 들어 ‘품질’보다는 눈앞의 실적에 급급하는 관행 탓이라면 삼성의 DNA에 맞지 않는 경고음이다. 삼성의 힘은 품질과 기술력이었다. 그런 기반이 흔들린다면 위험한 전조일 수 있다.

현재 노트7 단종에 따른 직접 손실이 최소 3조원이라든지, 브랜드 가치 훼손까지 감안하면 최대 20조원이라느니 갖가지 셈법이 나오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가 518억 달러(58조원)라는 조사결과를 보면 터무니없는 얘기도 아닌 것 같다. 국내의 어떤 대기업이든 몇 천억원만 손실을 봐도 회복하기 힘든 상처인데 무려 수조원을 허공에 날리다니….

그러나 그 돈이 삼성 스스로 곪은 환부를 도려내고, 더 큰 재앙을 막는 데 지불하는 수업료라고 생각하면 큰 금액이 아닐 수 있다. 세계 1등 지위를 누리던 기업들도 한순간 방심으로 시장에서 퇴출되는 경우가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삼성이 노트7 단종 악재를 딛고 과거처럼 반전을 이뤄낸다면 현재 손실은 미래의 종잣돈으로 여길 수 있다. 반면 소잃고 외양간도 못고친다면 삼성 뿐아니라 삼성에 20%가량을 의지하는 우리 경제의 미래도 암울하다.

이 회장은 삼성전자 임원 200여명을 프랑크푸르트로 소집할 때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삼성전자가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국에서 1등에 오르다보니 자만심에 빠졌다.” 20여년이 흐른 ‘글로벌 1위’ 삼성전자도 곱씹어볼 얘기가 아닐까.

노석철 산업부장 schr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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