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뉴스] 1순위 따라붙는 ‘복코’ 허재에겐 뭔가 있다? 기사의 사진
(1) 김종규(오른쪽)가 2013년 프로농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창원 LG에 지명된 뒤 사전제작 유니폼을 입고 김진 감독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 지난해 신인 드래프트 행사장에 놓인 구단별 테이블. (3) 허재 농구국가대표팀 전임 감독(가운데)이 2002년 TG삼보 플레잉코치 시절 신인 드래프트 1순위를 잡은 뒤 웃는 모습. (4) 3일 열린 2016 신인 지명순위 추첨행사에서 양복 색깔을 맞춰입은 서울 SK 문경은 감독(오른쪽 두번째). (5) 올 시즌 신인 드래프트 최대어로 꼽히는 고려대 센터 이종현.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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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월 29일 프로농구(KBL) 신인 드래프트가 열린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원주 TG삼보(동부)의 1순위가 확정되는 순간 당시 플레잉 코치였던 허재 남자농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두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만세!’를 외쳤습니다. 일명 ‘허재 만세 사건’입니다. 코트 위에서 그 누구보다도 냉철했던 허 감독의 반응은 참으로 의외였는데요. 향후 10년간 KBL을 좌지우지할 특급 ‘빅맨’ 김주성을 얻었다는 생각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 겁니다. 김주성은 그 기대대로 10년 넘게 팀을 최정상급 구단에 올려놓았습니다.

‘농구는 센터놀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신 선수가 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죠. 그래서 걸출한 빅맨이 등장하던 해에는 신인 드래프트 열기가 어느 때보다도 후끈 달아오르곤 합니다. 일부 구단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신인 지명 1순위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기도 하죠. 대형 신인을 잡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떠한 수고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요.

1순위를 잡고픈 자, 테이블보를 먼저 덮어라

신인 드래프트 행사장에 배치된 구단 테이블에 가장 먼저 ‘테이블보’를 덮으면 지명 1순위를 잡는다는 속설은 프로농구계에서 아주 유명합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오는 18일 열릴 신인 드래프트에는 이종현 강상재(이상 고려대) 최준용(연세대) 등 ‘빅3’로 불리는 대형 신인이 참가합니다. 이들은 모두 200㎝ 이상의 장신으로 ‘제2의 황금세대’ 등장을 예고했는데요. 프로 무대에서도 즉시 전력감으로 분류됩니다.

올 시즌 센터 영입을 노렸던 부산 kt는 지난 3일 신인 드래프트 지명순위 추첨행사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10개 구단 중 가장 먼저 테이블보를 깔았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2013년 창원 LG와 이듬해 고양 오리온은 지명 1순위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김종규와 이승현이라는 빅맨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속설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kt는 아쉽게도 6순위였습니다. 1순위는 울산 모비스에 돌아갔죠. 모비스 유재학 감독은 1순위의 행운을 얻고서는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했습니다. 숱한 우승컵을 들어올린 유 감독은 “우승했을 때보다 더 기쁘다”고까지 말하기도 했습니다.

서울 SK 문경은 감독은 올해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제2의 안드레 에밋’이라 불리는 테리코 화이트를 지명했습니다. 문 감독은 신인 드래프트에서 그 기운을 이어가고자 “그때와 똑같은 양복, 넥타이는 물론 양말에 속옷까지 맞춰 입었다”고 했습니다. “전지훈련을 마치고 돌아와 옷 챙길 시간이 없어서 영상통화로 의상 준비를 부탁했다”고도 했습니다. 효과가 있었던 걸까요. 문 감독은 신인 전체 2순위 지명권을 얻고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사실 SK 구단 측에서는 따로 준비한 게 없었습니다. 오히려 SK는 지명순위 추첨행사 당일 테이블보를 가장 늦게 깔았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상책

국내선수 전력이 약했던 인천 전자랜드는 2년 전까지만 해도 신인 지명에 내심 기대를 걸었습니다. 대학농구 리그를 지배했던 이승현을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대구 팔공산에 올라 108배를 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승현은 고양 오리온이 데려갔습니다. 그래서 지난해부터는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수장 유도훈 감독만 사찰을 조용히 찾아 마음 정리를 하고 내려왔다고 하네요. 올해는 3순위를 받았습니다. 빅3 중 최소 한 명을 고를 기회가 생긴 셈이죠.

김태술 양희종 등 ‘황금세대’가 대거 참가했던 2007년 신인 드래프트 때는 마치 007작전을 방불케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SK 코칭스태프는 가드 김태술을 잡기 위해 드래프트 전날 인근 호텔 스위트룸에서 묵었습니다. 미리 제작한 유니폼을 베개 밑에 깔고 잤습니다. 드래프트 당일 자정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가 테이블보를 덮기도 했죠.

과거 프로농구계에는 1순위를 잡으려고 벌이는 이벤트가 많았는데 이젠 거의 하지 않는 추세입니다. 오리온 모비스 삼성 SK 등 다수의 구단은 2016시즌 신인 지명순위 추첨 행사를 앞두고 차분한 마음으로 기다렸다고 합니다. 동부는 13년 전 최대어 김주성이나 8년 전 윤호영을 뽑을 때도 조용히 드래프트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유니폼 만들어놨으니 몸만 오렴”

하승진 오세근 김종규 등 빅맨이 참가했던 2008·2011·2013년 드래프트 때는 다수의 구단이 선수 유니폼을 사전 제작하는 풍경이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모두 다 웃을 순 없었습니다. 전주 KCC, 안양 KGC, LG가 차례로 거물급 빅맨을 뽑았습니다. KCC는 하승진 몸에 맞는 9XL 사이즈 유니폼을 준비했고, KGC와 LG는 오세근과 김종규의 이름과 배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미리 준비해 지명과 동시에 입혀줬습니다. 특히 LG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습니다. 김종규를 얻기 위해 목욕재계는 물론이고, 고사까지 지냈을 정도였는데요. 그 덕분인지 몰라도 세 팀은 다른 구단과는 달리 귀하다는 빅맨 걱정을 덜게 됐습니다.

허 감독은 프로농구에서 ‘선수 뽑기’ 제왕으로 유명합니다. 플레잉 코치 시절 김주성을 시작으로 하승진 김민구 박경상 김지후 등 걸출한 신인을 손에 넣었습니다. 2009년 귀화 혼혈선수 드래프트 때는 1순위로 전태풍을 뽑았죠. 미신 따윈 믿지 않는다며 드래프트를 앞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하승진을 지명한 드래프트 전날에도 숙소에서 휴식을 취했다고 합니다. 농구계에선 허 감독의 타고난 ‘복코’ 때문이란 얘기까지 나돌았습니다. 그 기운이 남았던 탓일까요. 지난해 허 감독에 이어 부임한 KCC 추승균 감독은 1라운드 전체 3순위로 ‘고졸 루키’ 송교창을 지명했습니다.

오는 17일 열릴 여자프로농구(WKBL) 신인 지명 행사도 큰 관심사입니다. 차세대 센터 박지수(분당경영고)가 참가하기 때문이죠. 박지수는 195㎝의 큰 키에 국가대표 경험까지 갖춘 1순위 유력 후보입니다. 한 구단 관계자는 “고사라도 지내야 할 것 같다”고 했는데요. WKBL에도 대형 신인을 뽑기 위한 이색 풍경이 그려질지 궁금합니다.

글=박구인 기자 captain@kmib.co.kr, 그래픽=박동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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