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김미나] 혐오가 뒤덮은 세상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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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 진짜 극혐이다. 극혐.” 버스 안에서 뒷자리에 앉은 학생이 말했다. 옆에 앉은 친구는 깔깔대며 웃었다.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남루한 옷을 입은 꾀죄죄한 모습의 한 노숙인 여성이 있다. 여성이 바닥에 대자로 뻗어 풍경을 헤치거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며 구걸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서 있었을 뿐이다. 여의도 빌딩 숲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었을지는 몰라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가 혐오라는 단어를 이렇게 쉽게 입에 올리진 않았던 것 같다. 내겐 언제도 누군가 다른 이에게 “널 혐오해”라고 말했던 기억이 없다.

싫어할 혐(嫌)에 미워할 오(惡). 어느새 싫고 더 싫은 이 감정은 우리 사회 가까운 곳으로 침투했다. 극혐은 ‘극혐오하다’의 줄임말이다. 국립국어원은 혐오하다에서 정도가 심하다는 뜻의 접두사 극(極)을 더한 극혐오하다를 2014년 신어로 꼽았다. 여혐(여성 혐오)이나 남혐(남성 혐오)은 이제 일상어가 됐다. 수많은 사건 사고가 이 혐오의 잣대로 재단된다. 최근 일본 오사카에서 이른바 ‘와사비 테러’가 발생하자 혐한(한국 혐오)에는 혐일(일본 혐오)로 맞서자는 말까지 나온다. 혐오엔 혐오로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싫고 또 싫은 것을 강조, 다시 강조하는 이 부자연스러움에 우린 어느새 익숙해져버렸다. 알겠지만 ‘극사랑하다’나 ‘극행복하다’ 같은 말은 아무도 쓰지 않는다.

같은 맥락에서 접미사 ‘충(蟲)’은 신조어를 여럿 양산했다. 급식을 먹는 학생을 비하하는 급식충, 유난스럽게 아기를 키우는 젊은 엄마를 비하하는 맘충은 몇 달 전 어린이를 동반한 고객의 출입을 제한하는 ‘노 키즈 존(No kids zone)’ 찬반 논란과 함께 떠올랐다. 틀딱충(틀니 소리를 빗대 노인을 비하하는 말) 같은 해괴망측한 단어도 등장했다. “싫으니까 더 싫다”거나 “그냥 싫다”는 말, “나는 여성이 아니니까 싫다” 혹은 “나는 너보다 젊으니까 싫다” 같은 논리 없는 혐오엔 누구도 손쓸 도리가 없어 보인다.

혐오가 우리 사회만의 이슈는 아니다. 지난여름 유럽을 뜨겁게 달군 무슬림 여성용 수영복 부르키니 논란은 이슬람 문화와 여성을 향한 혐오에서 기인했다. 이민자에 대한 혐오는 유럽 대륙을 1순위 테러 위험 지역으로 만들었고, 잇따른 미국의 경찰 총기 사고는 흑인 혐오에서 불거졌다. 중동의 여성 혐오가 가져온 인권 유린은 역사에 빼곡히 기록돼 있다. 안타깝게도 모두 여전히 진행 중이다.

혐오의 심연엔 “나는 너와 다르다”는 극단의 경계 짓기가 있다. 그렇다고 이 경계 짓기가 선과 악, 맞고 틀림, 남북이나 동서 같은 지역주의, 갑을 관계처럼 명확한 법칙에 따른 것도 아니다. 누구라도 상관없이 오직 공격만을 목적으로 한 경계 짓기인 경우가 다반사다. 이치에 어긋나게도 갑을 혐오해야 할 을은 오히려 병이나 정에게 화살을 겨눈다. ‘갑’의 가면을 빌려 쓴 약자가 또 다른 약자를 혐오하는 모습은 씁쓸하다.

열패감과 상대적 박탈감은 혐오를 부추긴다. 때문에 혐오는 양극화와 함께 온다는 해석이 나온다. 경제, 교육, 지역, 문화 등 우리 사회의 가장 시급한 해결 과제로 꼽히는 것은 단연 양극화다. 2012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소득집중도)은 44.9%로 미국(47.8%)에 이어 두 번째다. 1995∼2012년 동안 소득집중도는 15.7% 포인트나 올라 소득불평등이 가장 심화된 국가로 꼽혔다. 왜 우리 사회가 이토록 혐오에 몰두해 있는지 조금은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는 극단으로 나뉜 사회에서 터져 나오는 아우성이 사회를 어떻게 바꾸는지 보고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 유럽을 중심으로 부는 극우주의 바람의 원인으론 양극화가 꼽힌다.

“나약함을 숨기려는 인간 욕구의 발로(發露).”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를 이렇게 정의했다. 그러면서 “인간의 불완전성을 부정하고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는 일, 타자를 배제하려는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된 혐오가 자유 민주주의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들을 파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혐오가 뒤덮은 세상에서 평등이나 화합, 상생 같은 공동체 가치는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허울뿐인 양극화 해법은 쏟아지는데 어느 곳 하나에서도 나아지고 있다는 희망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오늘도 극혐을 외치는 일그러진 얼굴들이 애처로워 보인다.

김미나 국제부 기자 mina@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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