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현자 <4> 이대 YWCA회장 활동 중 ‘몸조심’ 협박편지

신탁통치 지지하던 좌파 소행 추정… 김옥길 사감 “외출 자제하라” 당부

[역경의 열매] 김현자 <4> 이대 YWCA회장 활동 중 ‘몸조심’ 협박편지 기사의 사진
1949년 이화여대 영문과 재학시절 김현자 전 국회의원(오른쪽)이 동기인 이춘란 최윤애 라영군 이정순과 함께 교정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해방 직후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둘러싼 이념 대립은 우리 민족을 분열시켰다. 여운형 장덕수 김구 등과 같은 애국지사들이 양 진영 테러 분자의 흉탄에 쓰러졌다. 지식인과 학생들 역시 좌우로 나눠져 첨예하게 대립했다. 초기 좌우 모두 신탁통치에 반대했으나 좌익 계열은 찬성으로 돌아섰다. 민족의 운명은 열강의 이해에 휩쓸려가고 있었다.

당시엔 연희전문 학생들이 모두 이화여전 교정을 가로질러 통학했다. 시위를 할 때도 우리 학교 교정을 지나가면서 학생들을 불러냈다. “이전 학생 나오라.” 그러면 공부하던 학생들이 박수를 치면서 시위대에 합류했다. 나는 시위에 가담하지 않는 소수 학생에 속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회주의에 동조하기 어려웠고, 광복한 조국의 ‘또 다른 지배’를 선뜻 수용할 수 없었다.

1947년 후반쯤 기숙사 사감이었던 김옥길 선생이 나를 포함해 학생 몇 명을 불렀다. “일제시대 말 해체됐던 이화여대 안의 YWCA를 재건하기로 했다.” 그때 나는 YWCA라는 기독여성단체를 처음 알게 됐다. 영문과 학과장이던 박마리아 선생의 권유로 재건된 YWCA 회장을 맡게 됐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

회장이 된 뒤 성경을 매일 읽었다.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유물사관을 담은 책을 탐독하기도 했다. YWCA 임원들은 기독교 특강 등을 준비했다. 김재준 이환신 강원용 목사 등이 자주 초빙됐다. 특히 예리한 통찰과 웅변으로 청년들을 사로잡은 강 목사는 경동교회를 중심으로 ‘신인회’를 조직해 기독학생운동을 지도했다. 나도 그의 제자가 돼 모임에 참석했다.

어느 날 내게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발신인 칸에는 ‘친우로부터’라고 적혀 있었다. “오늘날과 같이 과학문명이 발달한 세상에서 미신인 기독교를 믿고 YWCA 회장을 하다니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오. 당장 기독교를 버리시오. 그리고 ○○일까지 본관 현관에 ‘신탁통치 절대지지’라고 크게 써 붙이시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상에 해로울 줄 아시오.” 온몸이 덜덜 떨렸다. 좌파를 지지하는 학생들의 협박으로 추정됐지만 발신자를 확인할 길은 없었다.

“당분간 수업시간 외에는 외출을 하지 말아라.” 김옥길 사감은 이렇게 당부했다. 신앙 때문에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얼마 동안 근신한 뒤 나는 예전처럼 YWCA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미국 YWCA에서 파견된 박에스더 선생이 우리를 지도했다. 하와이 태생의 그녀는 미국에서 생활할 때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를 받기도 한 재원이었다. 늘 명랑하고 긍정적이었다.

여름방학 때 YWCA와 YMCA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하령회에 참가했다.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남녀가 원을 만들어 춤을 추게 됐다. ‘남녀유별’ 관념에 익숙한 나는 도저히 남학생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 박 선생 등이 “괜찮다”며 설득했지만 나는 울상이 돼 뒷걸음질쳤다. 결국 검지 하나만 내밀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1949년 7월 졸업 전까지 대학에서 훌륭한 스승들을 만나고 여성문제 등 사회에 눈 뜨며 크게 성장했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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