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인의를 찾아서-(84) 삼성서울병원 중증환자치료센터] 중환자 치료의 새 장 열다 기사의 사진
중환자의 생존율 향상과 일상복귀를 돕기 위해 조기재활팀을 운영 중인 삼성서울병원 중증치료센터 의료진. 왼쪽부터 고명균 호흡치료전문간호사, 김선미 내과중환자실 파트장, 고진영 약사, 조수현 호흡치료전문간호사, 성유미 간호사, 중환자의학과 서지영(센터장), 정치량 교수, 원선영 간호사, 고영준 물리치료사, 이희옥 간호사. 삼성서울병원 제공
지난해 급성호흡곤란증후군으로 한 달여간 중환자실 신세를 졌던 A씨(38·여). 건강 회복 후 최근 직장에 복귀했지만 마음 한 쪽은 여전히 중환자실에 머물러 있다. 중환자실에서 기도삽관을 할 때 받았던 충격이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투병 중일 때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 것만 같았던 섬망(?妄) 증상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다고 털어놓는다. A씨는 이른바 ‘중환자 치료 후 증후군’(PICS)을 겪고 있다. 섬망은 급성 뇌기능 이상으로 나타나는 의식 장애다. 멍해지거나 환각 증세를 보이기도 하고, 심하면 소리를 지르고 주사 바늘을 빼거나 물건을 부수기도 하는 과다행동을 보인다. 섬망 발생 시 인지기능도 동시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중환자 치료에 새 바람이 불고 있다. 국내에서도 중환자실을 벗어나 일상에 복귀하는 사람들이 A씨와 같은 중환자 치료 후 증후군을 겪지 않도록 조기재활 치료를 도입하자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유럽 및 미국 중환자의학회가 최근 새 중환자 진료지침을 만들고 중환자 조기재활 치료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서면서부터다.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이는 곳은 삼성서울병원 중증치료센터다. 서지영(53) 삼성서울병원 중증치료센터장은 대한중환자의학회 산하 중환자재활연구회 회장이기도 하다. 서 센터장은 지난달 4일 삼성서울병원 암병원 지하1층 강당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태평양 중환자 조기재활 컨퍼런스를 주도했다.

삼성서울병원은 2013년 국내 최초로 중환자의학과를 개설했다. 적자 운영을 피할 수 없다며 모두가 투자를 꺼릴 때 삼성서울병원은 환자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인 중환자의학을 발전시키는 것이 세계 수준의 병원으로 도약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 결과 선진적인 중환자 치료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

삼성서울병원 중증치료센터는 서 센터장을 포함해 중환자의학과 전문의 16명과 감염내과, 신경외과, 심장외과, 응급의학과 교수 4명 등 총 20명의 전문가로 의료진을 구성했다. 이들은 365일 24시간 순환근무 체계를 갖추고,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급성악화 사태에 대비해 만반의 중환자 치료 환경을 구축해 놓고 있다.

특히 중환자 조기 재활치료를 위해 정치량 교수를 주축으로 재활의학과와 호흡치료 전문 간호사, 물리치료사, 약사 및 중환자실 간호사 등이 매일 아침 중환자실에서 재활회의를 진행한다. 이 회의에서 최적의 다학제 개인맞춤 조기재활 치료계획도 수립된다.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는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으면 다시 한 번 삶의 끈을 이어갈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후유증을 겪기도 쉽다. 대표적인 사례가 중환자실 치료 중 얻은 ‘쇠약증’이다. 중증 질환에 따른 신경, 근육 위축이 진행되거나 환자를 안정시키기 위해 투여한 진정제, 수면제 등으로 환자의 활동량이 줄면서 전신 근력이 약화되는 증상이다. 심한 경우 중환자실을 나가게 됐을 때 몸이 앙상하게 마른 상태여서 걷는 것조차 힘겨워 하기도 한다. 대개 퇴원 후 수개월 내 회복되지만, 영구적으로 회복하지 못하는 이도 28%나 된다. 급성호흡곤란증후군을 겪은 경우 퇴원 당시 36%, 퇴원 후 3개월 22%, 6개월 7∼15%, 1년 4∼14%, 2년 9%의 환자가 심신쇠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서 센터장은 17일 “인지기능이 치매 환자 수준으로 떨어지는 증상이나 우울증과 신경장애도 중환자실 퇴원 후 환자들의 삶의 질을 떨어트리는 주요 위험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 예로 중환자실 집중치료 1년 후 인지기능저하 비율은 46∼78%이고, 2년 후에도 그 비율이 25∼47%에 이른다는 보고가 있다. 중환자실 치료 경험이 있는 환자 중 절반 이상이 퇴원 1년 후에도 이전 직장으로 복귀하지 못하는 이유다.

서 센터장은 “중환자의 경우 당장 위태로운 생명의 불꽃을 되살리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진정한 중환자 회복은 생존 자체가 아니라 기존 생활로의 복귀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삼성서울병원 중증치료센터는 이를 위해 최근 ‘ABCDE, 5가지 치료 프로토콜’을 새로 확립했다.

먼저 A는 환자를 깨우는 것(Awakening)을 뜻한다. 중환자라고 가만히 눕혀 놓고 마냥 재우기만 해선 안 된다는 의미다. 수면제나 진정제 사용을 되도록 줄이고 깨어있는 시간을 늘리는 방법이다. 반대로 잘 때는 충분히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조명과 소음, 보온 등을 세심하게 관리한다. B(Breathing)는 자발 호흡 유도, C(Coordination)는 환자와 적극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유기적 관계를 맺는 것을 지칭한다.

D(Delirium monitoring and management)는 섬망 증상을 조기에 발견·관리하자는 것이다. E(Early mobilization)는 환자가 조기에 움직일 수 있게 돕는 걸 말한다. 중환자라고 계속 누워 지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게 삼성서울병원 중증치료센터의 기본 방침이다.

서 센터장은 “나중에 퇴원하면 서서 걸을 수 있도록 중환자실 안에서도 가능한 범위 안에서 앉거나 서고 걷는 등의 재활치료를 시작하는 게 좋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병상에서 근력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한다든지, 침상용 전동자전거 기기를 갖다놓고 유산소 운동을 하게끔 해주는 것이다. 보통 몸을 가눌 수 있도록 앉은 자세 훈련, 보행훈련도 병행한다.

이런 식으로 조기 재활치료를 받은 중환자는 신체·정신적 회복 속도가 빠르다. 인공호흡기를 일찍 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신체기능 회복이 빨라 많은 중환자들을 괴롭히는 섬망 증상 역시 줄어들게 된다.

서 센터장은 “앞으로 중환자 조기 재활치료를 시행하는 병원이 점점 더 많아질 것으로 본다. 중환자실이 절망의 끝이 아니라 새 희망의 싹을 틔우는 곳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더욱 정진하겠다”고 다짐했다.

이기수 의학전문기자 kslee@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