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현자 <6> 흑인 친구의 눈물 통해 인종차별 높은 벽 실감

‘신세계’ 같은 미국생활에 문화충격… 채플시간 6·25 참상 전하다 눈물만

[역경의 열매] 김현자 <6> 흑인 친구의 눈물 통해 인종차별 높은 벽 실감 기사의 사진
김현자 전 국회의원(가운데)이 스잔(오른쪽)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부총무 및 일본 유학생 마키노와 함께 1951년 미국 미시간주 칼라마주대학에서 열린 WSCF 세미나에 참석했다.
부산 수영비행장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노스웨스트항공사가 1주일에 2차례 정기운항을 시작한 직후였다. 나는 분홍색 저고리에 검정 비로드(벨벳) 치마 차림이었다. 지갑 등 소지품을 둘둘 말은 보자기를 옆구리에 꼈다. 뉴욕 공항에는 박에스더 선생이 마중 나왔다. 현지 신문에는 한국전쟁이 매일 집중 보도되고 있었다. 미국 YWCA 국제부 직원들은 전쟁에서 빠져나온 나를 동정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던 것 같다.

미국의 모습은 내게 ‘문화 충격’이었다. 피난 보따리, 고아들이 떠도는 거리, 간간이 들리는 포성 등 전쟁에 익숙하던 내 눈과 귀 앞에는 그야말로 신천지가 펼쳐졌다. 하늘 높이 치솟은 빌딩, 거리를 매운 자동차 물결, 상점에 쌓인 물건들…. ‘우리 민족은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데, 지구 한편에선 이렇게 풍요롭게 사는구나!’ 유학 초기 이런 생각으로 잠을 뒤척였고, 눈물로 베개를 적실 때가 많았다.

미국에 가자마자 켄터키주 브리아대학에서 열린 수련회에 참석했다. 채플시간에 한국전쟁에 대해 이야기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지금 한국에서는….” 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 슬픔이 복받쳤다.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결국 눈물만 흘리다 내려왔다. 참석자들은 내 눈물을 통해 전쟁의 참상과 고통을 느꼈다고 했다.

나는 여성을 배려하는 미국의 ‘레이디 퍼스트(Lady First)’ 문화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건물에 들어갈 때 남자가 여자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길을 걸을 땐 남자가 차도 쪽에 서서 여자를 보호했다. 여자가 방에 들어오면 남자들이 모두 일어나 인사를 했다. 처음엔 그런 대접에 낯설어 한참 쭈뼛거렸다.

하지만 미국처럼 풍요롭고 자유로운 사회에 ‘거대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951년 여름 YMCA와 YWCA 콘퍼런스에 참여했을 때다. 페니라는 흑인 여학생과 나는 친해졌다. 대회를 마친 뒤 기차역까지 동행했다. 마침 저녁 시간이었다. 나는 걸으며 말했다. “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고 가면 어떨까?”

페니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페니가 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다.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페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물 줄기가 그녀의 볼을 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놀라 이유를 물었다. “미안해. 난 너를 좋은 식당에 안내하고 싶은데, 널 데려갈 수가 없어. 좋은 식당엔 흑인이 들어갈 수가 없거든. 흑인전용 식당은 초라해서 널 데려가고 싶지가 않아.”

나는 페니를 위로했다. “나도 백인이 아니야.” 우리는 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역 대합실에도 ‘백인전용(Whites Only)’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역사 밖에서 기차를 기다렸다. 승차를 할 때도 페니는 흑인에게 지정된 맨 뒤의 객차를 타야 했다. 지정된 객차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페니의 뒷모습은 쓸쓸해 보였다.

그날 인류 역사에 선연한 차별의 아픔 한 가지를 목격했다. 나는 조용히 기도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는 주님, 페니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언젠가 이 인종 차별의 벽을 허물어주소서.’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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