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현자 <7> 6·25 전쟁 중 세계기독청년대회에 참가

각국 참가자들 나에게 “어머, 불쌍해”… 귀국후 부산으로 옮긴 YWCA서 일해

[역경의 열매] 김현자 <7> 6·25 전쟁 중 세계기독청년대회에 참가 기사의 사진
1952년 말 인도에서 열린 세계기독청년대회에 참가했을 때다. 한 참가자가 끌어주는 인력거에 올라탄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는 컬럼비아대 사범대학원과 뉴욕 유니온신학교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종교교육 과정을 공부했다. 당시 유니온신학교에는 폴 틸리히, 라인홀드 니버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 교수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한 학기에 6과목씩 수강했고 제법 좋은 성적을 받았다.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세계기독청년대회에 세계YWCA 대표로 참가하게 됐다.

독일 등 유럽 각국을 순방하고 인도에서 열리는 청년대회에 참석한 뒤 태국 등 아시아를 돌아 53년 2월 넉 달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긴 여정이었다. 14개국 YWCA 사무국을 방문했다. 말하자면 ‘세계일주’였다. 1952년 10월 말 미국 뉴욕 항을 떠나던 날 컬럼비아대에서 만났던 유학생 오기형씨 등이 나를 배웅했다. 그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유학 중 내게 청혼했고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독신으로 지내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만약 결혼하게 된다면 저 사람과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다. 뉴욕 항에서 퀸 엘리자베스호에 올랐다. 길이 300m가 넘는 이 배는 극장, 무도회장, 수영장 등을 갖춘 초호화 여객선이었다.

방문국 중 독일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전후 복구가 진행 중이었지만 거리도 사람도 침울했다. 독일YMCA에서 독일과 미국 대학생들의 토론이 있었는데, 미국 학생들은 형식적으로 참여했으나 독일 학생들은 진지했다. 전기 시설이 복구되지 않은 독일 사무실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한 독일 학생이 말했다.

“이 방은 이렇게 어둡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슴에는 태양보다 밝은 빛이 있습니다. 우리는 머지않아 세계를 밝힐 것입니다.”

부족함 없는 미국 청년들보다 초라한 독일 청년의 말이 더 와 닿았다. 우리 조국의 상황과 비슷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기독청년대회에는 2차 세계대전 후 처음으로 세계 각국의 기독청년들이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40여개국에서 300여명이 참여했다. 한국에서는 강원용 목사 등이 참여하려 했으나 정부가 허락하지 않았다. 인도가 6·25전쟁 중 중립국을 자임했다는 것이 빌미가 됐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지나친 관심을 받는 사람이 됐다. “어머, 불쌍해”하고 누군가에게 귀엣말을 하는가 하면 내가 지나갈 때 “코리아” “코리아”를 연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비참한 기분이었다. 전 세계 신문이 연일 한국전쟁을 보도하고 있었다.

비자투흐트 세계교회협의회(WCC) 총무는 “전쟁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은 이들이 화해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화목제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연설했다. ‘내가 화목제가 되는 길은 무엇일까.’ 고민했다. 귀국 후 전쟁으로 부산 남포동으로 사무실을 옮긴 YWCA에서 일하게 됐다. 종종 사무실 근처 자갈치시장에 나가곤 했다. “아지매, 여 쫌 보이소. 진짜 싸예!”

거친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는 강인함과 활력이 있었다. 전쟁의 그림자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침울한 독일 사람들과도 달랐다.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고전 10:13).” 나는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시련을 이길 힘도 주셨다는 것을 믿고,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기도했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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