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뉴스] 흉물이라니요… 전봇대는 억울합니다 기사의 사진
신장 14m, 몸무게 1500㎏. 수명은 30년. 하는 일은 간단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700∼1000㎏짜리 전깃줄을 일평생 매달고 있으면 됩니다.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이것을 사람들은 ‘전주(電柱)’라 부릅니다. 다른 말로는 ‘전봇대’라고도 합니다. 아, 일련번호라는 나름 이름도 있네요. 요즘 전봇대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전력선과 통신선 등을 집집마다 연결해 주던 역할에 더해서 다양한 일이 맡겨졌는데요. 전기차가 달릴 수 있도록 전기 충전을 해 주고 홀로 사는 노인도 돌봐줍니다.

우리가 모르는 電柱 이야기

일련번호 ‘전동간32L7’ 전주는 경복궁 근정전 길 맞은편에 세워져 있습니다. 경복궁의 밤을 밝혀주는가 하면 연간 310만명에 이르는 경복궁 방문객이 전화를 걸 수 있게 도움을 줍니다.

전주가 사람 많은 곳에만 필요한 건 아닙니다. 일련번호 ‘사구간513L36’은 해남 최남단인 전라남도 해남군 송호리 산 44-3번지에 우뚝 서 있습니다. 이 전주가 없다면 등대는 불을 밝힐 수 없을 겁니다. 전주는 말 그대로 문명의 혈액이라 불리는 전기를 실어 나르는 전선을 허공을 가로질러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전주의 역사는 1887년 3월 경복궁 후원인 건청궁 앞뜰에 설치한 백열등에 불이 들어오던 날 시작됐습니다. 바로 전동간32L7이 서 있는 자리입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전주의 쓰임새도 다양해졌습니다. 1920년 4월 2일자 신문기사를 볼까요.

“일본 각지 군대에 대해 과격한 인쇄물을 살포하고 또 북월 방면에서는 사회주의자가 제작한 격렬한 노래를 전신주 등에 첩포한 자가 있는데….”

전단 부착은 전주가 처음으로 다른 용도로 사용된 사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쓰임새가 많아지면서 전주는 도심의 흉물이라는 다소 억울한 오명까지 쓰게 됐습니다. 전선은 물론 케이블선에 통신선까지 전주를 활용한 탓이 컸습니다.

그깟 전봇대라고 깔보면 안 됩니다. 들어가는 돈도 어마어마합니다. 한국전력은 지난해 점검과 관리비용으로 270억원을 썼고 설비 보수하는 데 2278억원을 사용했습니다. 물론 한전이 전주로 벌어들이는 돈은 있습니다. 통신사나 케이블TV 사업자가 통신망을 연결할 때 전봇대를 빌려주고 이용료를 받는 것이죠. 그런데 지난해 이용료 수입이 1804억원이었으니 적자입니다. 무단으로 사용하는 사업자들 때문이라고 하네요.

여기서 재미난 얘기 하나 더할게요. 전주에 들어가는 돈이 또 있는데요. 바로 전주가 서 있는 땅에 대한 임차료를 내고 있어요. 지방자치단체에 지불하고 있는데요. 전동간32L7이 있는 서울 종로구 사간동 55번지와 사구간513L36이 있는 전남 송호리 산 44-3번지의 임차료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특별시는 갑, 광역시는 을, 이외 지역은 병으로 구분해 차등 지불하고 있습니다. 2014년 점용료로 낸 돈이 2018억원이었다고 합니다.

전주의 최대 설계하중은 1000㎏f입니다. 1000㎏f는 1000㎏의 질량을 갖는 물체가 눌렀을 때의 힘을 말합니다. 1000㎏ 정도를 짊어져도 끄떡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네요.

30년에 걸쳐 무거운 전선을 지고 서 있는 전주를 위해 한전도 나름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못생긴 전주가 모습이 바꾸고 있는 겁니다. 한전은 전국에 있는 전봇대 900여만개 중 1만8000여개에 그림·문구, 조형물 등을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흉물에서 도시 미관을 살리는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죠.



전단부터 전기 충전까지

전주의 쓰임새는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위치 확인이 대표적인 기능이지요.

높이 1.8m에 있는 사각형 은색 판에 숫자와 영어로 이뤄진 8자리 전산화번호와 한글과 숫자, 영문자로 이뤄진 전주번호가 있는데요.

전산화된 전주번호는 산간지역이나 도로 등 파악하기 어려운 전봇대에도 고유번호를 부여해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만들어진 겁니다. 숫자 4개, 영문자 1개, 숫자 3개가 순서대로 나열돼 있는데 앞쪽 숫자 4개는 국가기본도(국토를 5000분의 1로 축적한 공간정보 데이터)에서 해당 전봇대가 속한 좌표 번호입니다. 영문자는 이 면적을 16등분해 500㎡로 나눈 구역을 표시한 것이고 마지막 숫자는 50㎡ 간격 내에서 전봇대가 꽂히는 순서대로 부여한 번호입니다.

전주번호는 전산화번호에 정보를 추가한 겁니다. 사업소가 지역 특징에 따라 임의로 정한 선로명에 변전소 위치를 기준으로 번호를 부여합니다. R과 L은 선로가 갈라질 때의 방향으로 오른쪽과 왼쪽을 뜻합니다. 전동간32L7을 보자면 종로 지역 사업소가 정한 전동간이라는 선로의 변전소에서 32번째 떨어진 곳을 뜻합니다.

전선만 걸치고 있던 전주는 이제 멀티플레이어가 되고 있습니다. 한전은 전국에 있는 900만여개의 전봇대 중 주차 공간 인근에 있는 3만개의 전봇대에서 전기자동차를 충전할 수 있게 만든다고 합니다. 이미 한전 부산울산지역본부는 세계 최초로 콘크리트 전주에 충전기를 융합한 ‘전주 일체형 전기차 충전기’를 자체 개발해 보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충전 인프라 확산을 주도하고 전주의 창의적 활용을 도모한다는 건데요. 전기차 충전 인프라를 획기적으로 늘리는 데 전주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전기차에 연결하는 충전기, 전류량을 제어하는 충전제어함(EVCCS), 전봇대 변압기에 연결돼 적정 전류 부하량을 측정하는 측정기 등으로 이뤄진 이 충전기의 충전 방식은 완속(5∼6시간), 중속(1∼2시간), 급속(15∼30분) 등 3가지인데요. 요금은 기존의 전기차 충전소처럼 카드로 결제할 수 있습니다.

사회안전망 기능도 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지능형검침인프라(AMI)와 연계해 소외·취약계층인 독거·치매 노인이나 장애인 등이 평소처럼 생활하고 있는지 판단한다는 겁니다. 가령 독거노인의 전력 사용량을 주기적으로 분석해 갑자기 사용량이 줄면 사회복지사에게 자동으로 통보해 어르신이 잘 계신지 확인하는 방식입니다.

세종=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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