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황주리의 나의 기쁜 도시] 내 사랑, 체코 프라하 기사의 사진
황주리 그림
카프카, 참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이다. 그래도 카프카 없이는 체코의 아름다운 수도 프라하를 이야기할 수 없다. 1990년 첫 체코 여행을 잊을 수 없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체코가 낳은 천재 작가 카프카의 소설 ‘성’을 실제로 재현해 놓은 듯한 프라하 성 문 안으로 들어섰던 어느 가을밤의 아스라한 기억, 그 저편에 내 서른 살 젊음이 소설 속의 문지기처럼 외롭게 서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문이 있고 또 문이 있고 끝없는 문들이 있었던 것 같다. 중세의 어둡고 희미한 불빛 아래 성 문 앞을 지키는 키 작은 문지기들은 마치 카프카의 소설 ‘성’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같았다. 이 세상의 예술은 그냥 우연히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코의 자본주의가 막 시작되던 26년 전, 인적 드문 프라하 성을 오르며 맞은편에서 일본어로 된 체코 여행 책자를 어두운 불빛 아래 읽으며 걸어 내려오는 여행자를 스쳐 지나갔던 기억이 어제처럼 떠오른다. 그 시절 프라하는 소매치기범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안전했고, 길을 물으면 데려다줄 정도로 순수하고 친절한 사람들의 도시였다. 지금처럼 수많은 명품 디자인 가게는커녕 기념품 가게 하나도 없던 그 고즈넉한 프라하를 어찌 잊으랴.

그때의 두근거림을 안고 프라하를 다시 찾은 2000년대는 서구 유럽 다른 도시들과 많이 닮아 있었고, 당연한 일이지만 관광객이 너무 많았다. 한 사람을 평생을 두고 몇 번을 만난다면 그 시간대에 따라 자신의 상황에 따라 다 그 느낌이 다를 것이다. 풍경도 그렇고 도시도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 가면 잊지 못하는 사랑스러운 도시 프라하마저 그렇다.

10년 전만 해도 길에서 곰방와, 사요나라 하던 시대는 지나간 지 오래고, 프라하 공항의 대지주인 대한항공 덕에 공항 어디에나 체코어와 독일어와 한국어가 나란히 씌어 있다. 가는 곳마다 한국인이냐고 묻는 기념품 가게들을 지나며 참 대단한 대한민국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천년 된 돌길을 걸으며 온 나라 전체가 세계 문화유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아름다운 유산을 물려받은 체코 사람들이 한없이 부러웠지만, 이들은 갤럭시 휴대폰과 K팝과 드라마의 나라 한국이 부러울지도 몰랐다. 볼타바 강을 끼고 스메타나의 하프 곡 ‘나의 조국’을 들으며 프라하의 유명인들이 묻힌 공동묘지 ‘비셰흐라드’를 찾는다. 이 삶이 어디까지인지 가보자는, 그래서 짧고 강렬한 삶은 뒤에 두고 자꾸만 길고 가느다란 삶 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늙어가는 게 아니겠냐고, 프라하의 고색창연한 돌무덤들이 묻는다. 시내로 돌아와 1968년 프라하 시민들의 민주화 물결로 가득했던 바츨라프 광장에 섰다. 문득 줄리엣 비노슈가 그 청순한 연기로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영화 ‘프라하의 봄’이 떠오른다. 빨간 줄을 치며 읽었던 그 영화의 원작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벅차게 떠올랐다.

이튿날은 시인 권대웅이 보내준 지도를 보며 카프카가 매일 산책하던 길을 따라 걸었다. 프라하는 밑도 끝도 없는 꿈을 꾸게 하는 태몽의 도시다. 꿈속에서 나는 어김없이 카프카를 만났다. 꿈속의 카프카가 내게 말했다. “선물을 하나 주겠네. 그대가 노벨 문학상을 타게 해주지. 그러고 나면 그대는 절대 그림을 그릴 수 없네.” 나는 하루 동안만 시간을 주십사 했다. 전날 카프카 박물관을 다녀온 탓인가 보았다. 다음 날은 낯선 곳에서 간첩으로 몰리는 꿈을 꾸다가 새벽에 깼다. 너무 억울해서 서툰 외국어로 아무리 아니라고 설명해도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이 불가능했고, 꿈속에서 나는 간첩임이 확실시되었다. 카프카 체험을 제대로 한 기분이었다. 체코 맥주를 마시며 빈둥대면서 몇날 며칠 책이나 읽었으면 싶던 프라하의 가을을 뒤로하고, 동화 속 같은 ‘체스키 크롬로프’로 떠난다. 높은 곳에 올라가 그 수없는 붉은 지붕들만 바라보고 있어도 행복한 체스키의 구도시에서도 한 사나흘 빈둥대며 책이나 읽고 싶었지만, ‘언젠가’로 미루며 모라비아 지방으로 떠났다. 모라비아의 수도 올로모우츠에도 레드니체, 발티체에도 미쿨로프에도 개인적으로 가장 맘에 들었던 중세 도시 텔츠에도 가을은 한창이어서 내 맘도 함께 불탔다. 세월이 멈춘 도시, 텔츠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가을의 평원을 달리며 시골길에서 결혼식을 구경하기도 한다. 모르는 사람의 결혼식은 늘 아름답다.

프라하로 돌아와 구시가를 어슬렁거리며 언제 다시 올까 생각한다. 피치 못해 헤어졌던 그리운 연인과 짧은 순간 재회하고, 또 다시 헤어지는 기분이다. 내 마음속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서로 옳다고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프라하를 떠나며 나는 그게 같은 소리라는 걸 안다. “안녕, 내 사랑 프라하….”

황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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