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이슈] 민주당 대선후보 힐러리 클린턴, ‘불합리’에 저항… 대학시절 그녀는 투사였다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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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미국 시카고 변두리 파크리지의 메인사우스고교 3학년 교실. 학생들은 졸업을 앞두고 동급생 중 10년 뒤 누가 가장 성공할지 얘기했다. 대부분 힐러리 로드햄을 꼽았다. 특히 미래의 졸업생 모습을 그린 학교 신문의 가상 기사에서 힐러리 로드햄은 시사주간 타임과 인터뷰를 한 유명한 검사로 묘사됐다. 그로부터 10년 뒤 그는 변호사가 됐다. 전도유망한 청년 빌 클린턴과 결혼한 상태였다. 동급생들은 홈커밍데이 30주년 행사 때 백악관 안주인이 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를, 지난해 50주년 행사 때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친구를 보게 됐다.

어려서부터 저항 이미지 강해

타임, 워싱턴포스트(WP), 공영방송 NPR은 최근 잇따라 클린턴의 어린시절을 조명했다. 이들 기사의 공통된 내용은 “클린턴은 어려서부터 투사로서의 싹수가 보였다”이다.

학창 시절 클린턴은 언제나 학생회장이 되고 싶어 했다. 당시만 해도 여학생이 회장이 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클린턴이 자란 파크리지는 엄격한 감리교 교리를 강조하는 보수 지역이다.

WP는 “남학생이 학생회장을 하면 가장 뛰어난 여학생은 학생회장의 비서 역할을 맡는 게 당시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때문에 클린턴은 늘 학생회장을 시도했지만 결국은 되지 못했다. 대신 그는 학생회 간부를 하면서 남성 위주의 학생회 활동에 태클을 걸었다. 불합리한 것은 반드시 행동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게 클린턴의 철칙이었다.

저항적 기질은 부모의 영향도 컸다. 아버지 휴 로드햄은 “남자아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여자인 너도 다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어머니 도로시 로드햄도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한테서 절대 도망치지 말라”고 입이 닳도록 말했다.

공화당 지지자에서 진보주의자로

클린턴은 고향의 보수적 분위기 때문에 중·고교 때는 열렬한 공화당 지지자였다. 고교 때 대선 모의토론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인 배리 골드워터 역할을 맡아 민주당의 린든 존슨 역을 맡은 아이들과 격론을 펼쳤다. 심지어 골드워터의 대선자금을 모으려고 세차 아르바이트를 했다.

클린턴은 이때부터 토론의 달인이었다. 한 동창생은 “클린턴은 머리가 좋아 논리 대결인 모의토론에서 늘 상대편을 격파했다”고 회고했다. 심지어 교사의 지시로 역할을 거꾸로 해 클린턴에게 존슨의 역할이 맡겨졌을 때도 상대 토론자를 압도했다. 명석하고 암기력이 탁월했던 그는 늘 특출한 학생이었다. 미국의 유명한 대입 장학금인 내셔널메리트장학금 대상자로 꼽혀 지역 언론인 시카고트리뷴에 소개되기도 했다.

보수적이던 클린턴은 고교 때 교회에서 돈 존슨 목사를 통해 진보주의적 사상을 접했다. 젊은 목사였던 존슨은 클린턴과 친구들을 종종 시카고 시내에 있는 ‘선데이 이브닝 클럽’에 데려갔다. 마틴 루서 킹 주니어(1929∼1968) 목사가 설교하는 곳이었다.

이때 경험을 통해 클린턴은 ‘남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가졌다. 클린턴은 자서전에서 “선데이 이브닝 클럽에서 접한 얘기들은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줬다. 그곳에서 머리를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기억했다.

기성 정치권 꾸짖은 웨슬리대의 당찬 여대생

클린턴의 투사적 자질은 보스턴의 명문 웨슬리대학에 입학하면서 더욱 뚜렷해졌다. 대학 내내 학생회 활동을 했던 클린턴은 각종 시위를 주도했고, 시위 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학교 예산 배분 문제부터 불합리한 학사제도와 시험제도 개정에 앞장섰다. 학교 밖 이슈에도 적극적이어서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에도 나섰다.

대학 4년 내내 투사였지만 투쟁의 절정은 마지막 날인 1969년 5월 졸업식 때였다. 클린턴이 주도한 학생회는 외부 저명인사만 하는 졸업 연설을 졸업생 대표가 할 수 있도록 학교 측에 요구해 관철시켰다.

졸업생 대표로 나선 클린턴은 바로 앞 순서였던 공화당의 에드워드 브룩 상원의원을 비판했다. 그는 “요즘 정치권은 겨우 가능한 것만 하고 있지만 진짜 정치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브룩은 통합, 신뢰, 존중이라는 고리타분한 단어만 늘어놓았다”면서 “하지만 빈곤선 아래서 어렵게 사는 13.3%에 달하는 극빈층을 비롯한 진짜 사회문제는 왜 회피하는가”라고 따졌다. 그러면서 “지금은 어떤 것보다 인간적인 정책과 진보적 시각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 연설은 전국적으로 큰 파장을 낳았다. 시카고트리뷴은 “우리 고향 출신 여대생이 예의 없는 연설로 대형 사고를 쳤다”고 비판했다.

클린턴은 웨슬리대를 졸업하고 예일대 로스쿨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만났고, 진보적 가치에 공감했던 두 사람은 졸업 2년 뒤인 1975년 결혼했다.

학창시절을 관통하는 클린턴의 이미지는 ‘저항하고 행동하는 젊은이’였다. 미국의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한 클린턴이 세계의 대통령으로서 진보적 가치 실현을 위해 어떤 행동에 나설지 주목된다.

글=손병호 기자 bhson@kmib.co.kr, 그래픽=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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