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형준] 생산적 개헌 논의를 위한 조건 기사의 사진
박근혜 대통령이 예상을 깨고 개헌 추진을 공식화했다.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개헌 논의를 더는 미룰 수 없다”며 “87년 체제를 극복하고 2017년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그 이유로 “개헌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고, 지금이 개헌의 적기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현행 5년 단임 대통령제 헌법은 과거 민주화 시대에는 적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이 됐다”며 “대립과 분열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지금의 정치 체제로는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개헌이 넘어야 할 산은 만만치 않다. 개헌 논의가 생산적이고 국민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시대정신이 반영된 포괄적 개헌 논의가 필요하다. 개헌이 권력을 나누기 위한 정치 개편의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 개헌의 순수성은 사라지고 정쟁만이 판을 치게 된다. 박 대통령은 “정파적 이익이나 정략적 목적이 아닌 대한민국의 50년, 100년 미래를 이끌어나갈 미래지향적인 2017체제 헌법을 국민과 함께 만들어가길 기대한다”고 했다. 개헌 논의에 대한 옳은 방향을 제시했다고 본다. 문제는 정치권의 개헌 논의는 주로 분권형 대통령제, 순수내각제 등 권력구조 개편에만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개헌은 권력구조 개편을 넘어 기본권과 지방 분권, 선거구제 개편 등으로까지 논의가 확대돼야 한다.

87년 체제 이후 약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시대는 바뀌었고 생명과 환경 존중 등 국민 기본권에도 변화가 생겼다. 특히 평등권에 대한 인식도 크게 바뀌었다. 양성평등이란 성별에 의해 차별받지 않고 누구나 보편적 인간으로 권리를 갖는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2000년 남녀 동수 법을 위해 헌법을 개정하기도 했다. 헌법에 ‘의원 선거와 선출직에 남녀의 평등한 진출’을 규정했다. 분권과 평등이라는 새 시대정신에 맞게 선거 제도도 변화돼야 한다. 승자 독식과 지역패권 정당 체제의 원흉인 소선거구제의 폐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선거제도 개편도 개헌에 포함돼야 한다.

둘째, 개헌 논의는 충분한 시간을 갖고 진행돼야 한다. 박 대통령은 “임기 내 헌법 개정을 완수하기 위해 정부 내에 헌법 개정을 위한 조직을 설치, 국민의 여망을 담은 개헌안을 마련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개헌 종결 시점, 내용과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시한부로 추진하면 결국 개헌 논의는 정치공학으로 빠지게 된다. 어떤 방식의 개헌을 채택하든 차기 정부가 개정 헌법을 적용할 경우 새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가 줄어드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개헌 논의는 정부보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가 중심이 돼야 한다.

셋째, 왜곡된 정치 과정을 바로잡을 수 있는 정치 개혁의 내용도 개헌에 포함돼야 한다. 대통령이 삼권분립 원칙을 지키면서 국회와 야당을 존중하는 방안을 포함시켜야 한다. 국회의원들의 특권을 폐지하고 의원들이 소신과 양심에 따라 의정활동을 할 수 있도록 만악(萬惡)의 근원인 공천 제도를 혁신하는 내용도 포함돼야 한다.

헌법은 ‘국가의 기본 법칙으로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고 국가의 정치조직 구성과 정치작용 원칙을 정하는 최고의 규범’이다. 더구나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역사와 정신이 녹아 있는 정신이다. 따라서 개헌은 권력구조 개편에만 치중하면서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정권 ‘비선실세’와 연계된 각종 의혹을 덮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되어서도 안 된다. 따라서 박 대통령이 개헌의 진정성을 보이고 생산적인 개헌 논의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각종 의혹의 정점에 있는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과 정권 비선실세 관련 각종 의혹에 대한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김형준 인문교양학부 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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