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이건 나라가 아니다” 기사의 사진
개헌 얘기를 한 번 써야지 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쓰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개헌에 찬성한다. 많은 논객이 주장했고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도 얘기한 그 이유에서다. 5년 단임 대통령제가 지긋지긋하다.

5년마다 정권이 바뀌면 개국(開國)이라도 하듯 거창한 청사진을 내놓는다. 정부는 물론 민간영역 구석구석 사람을 바꾼다. 지난 정부가 해온 일은 흔적도 없어지기 일쑤다. 개혁을 외치지 않은 정부가 있었던가. 개혁을 하려면 말이 먹혀야 하고, 말발을 세우는 쉬운 길은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검찰이 수사를 시작한다. 수사는 과거사를 다루는 일이어서 주로 전 정권 인사들이 포토라인에 선다.

그렇게 ‘개혁’을 하다보면 이 정권의 문제가 불거져 나온다. 경제가 흔들리거나 대형 사건이 터지거나 우병우 최순실 같은 의혹이 노출되거나. ‘5년 대통령’의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인 것은 이런 과정을 밟느라 시간이 없어서가 아닐까. 1987년 이후 창대한 시작과 초라한 끝을 여섯 번째 보는 동안 경제와 사회는 한계에 왔고 이제 미래를 말하는 게 두렵다…. 이런 얘기를 쓰려고 했다. 그런데 개헌을 해야 할 이유가 더 늘었다.

대통령은 경제 살리기를 포기했나 싶다. “이 상태에서 개헌을 하게 되면 경제는 어떻게 살리겠느냐”고 말한 것이 불과 6개월 전이다. 4년 내내 ‘개헌=블랙홀’이라며 막아서다 갑자기 말을 바꿨다. 왜인지 설명은 없다. 국회 연설에서 “고심 끝에” 그런 결론을 내렸다고 말한 게 전부였다. 친구 간에도 이렇게 무례할 순 없는 법이다. 상황이 바뀌었다거나, 이런 계기로 생각을 바꿨다거나, 하다못해 잘못 생각한 것 같다는 말이라도 해야 한다. 내가 고심하면 국가 미래가 걸린 일도 하루아침에 180도 뒤집을 수 있다는 제왕의 연설을 우리는 들었다. 한 사람의 ‘고심’에 우리 미래를 계속 맡겨야 하는가.

말이 바뀐 이유를 말하지 않으니 짐작하는 수밖에 없다. 최순실 국면전환용이란 의심은 그래서 합리적이다. “설마 그러겠어” 하던 사람도 “정말 그런가” 할 시점에 대통령은 개헌을 꺼냈다. 마침 최씨가 대통령 연설문까지 깊이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다. 최순실 사건은 국민이 대통령에게 몰아준 권력을 주위에서 어떻게 이용해먹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인터넷에는 ‘최순실은 하야하고 대통령은 사과하라’는 말이 나돌고 있다. 87년 체제 30년 만에 “이건 나라가 아니다”란 성토가 나왔다. 국민이 위임한 권력이 이렇게 사용(私用)되는 제도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가.

청와대 부연설명을 나는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읽었다. 개헌을 임기 내에 하겠다, 청와대가 주도권을 쥐겠다는 말은 레임덕을 겪지 않겠다, 다음 정권을 놓지 않겠다는 뜻이다. 권력을 쥐었다가 놓을 때 얼마나 비참해지는지 그들에겐 다섯 번 학습기회가 있었다. 그런 일을 막겠다는 집착이 아니면 이런 식의 개헌 제안을 설명할 길이 없다. 무례하고 의심스러운 방식을 무릅쓸 만큼 집착은 강했고, 이는 그들이 가진 권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웅변한다. 지나치게 커서 국정에 우선하는 권력을 언제까지 두고 봐야 하는가.

이런 권력이 등장하는 구조를 바꾸려고 개헌을 하자는 것인데, 그런 권력이 제안했다 해서 그만두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 정권은 개헌을 제안하며 개헌의 필요성을 ‘몸소’ 보여줬다. 오래 미뤄왔고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하다. 최대 걸림돌이던 대통령이 스스로 장애물을 치웠으며, 그 대통령을 개헌 과정에서 배제할 명분은 최순실이 제공했다. 이건 나라가 아니다. 국기문란 사태에 시간을 좀 가져야 할진 몰라도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 개헌의 필요성은 더 커졌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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