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이경원] 그녀가 하면 로맨스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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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파일’이 담긴 태블릿PC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비선실세 논란 정국의 가장자리에서 나도 무엇인가를 손에 넣긴 했다. 지난 13일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대회의실에서 이 나라를 걱정하던 정치인들은 감사 종료가 선언되자 썰물처럼 국정감사장을 빠져나갔다. 일순 찾아온 고요가 신기해 잠시 멍하게 있다 보니, 그들의 떠난 자리가 그리 깨끗하지는 못했다. 한 여당 중진 의원이 책상에 두고 간 메모지 맨 앞에 ‘팩트에 기반한 주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몇 페이지를 넘겨보니, 그는 ‘미르재단’이라 쓰고 밑줄을 쳤다.

“정치권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며 기부문화 확산 주장. 미르재단도 기업의 사회공헌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장려할 사안.” 눈길을 잡아끄는 대목은 그 다음 줄이다. “과거 정권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대북지원 사업이 많은 성금과 현물을 출자했다. 자기들 집권 시의 일은 로맨스고, 새누리당 때의 일은 스캔들인가?” 같은 당 다른 의원의 자리에는 “수사 후 미흡하면 특검도 가능한데. 배당을 문제시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쪽지도 있었다.

다른 기자들이 이미 훑고 지나간 최순실씨의 행적을 쫓다 소득 없이 귀가한 밤에 문득 이 메모지들을 꺼내 봤다. ‘네가 하면 로맨스냐’는 힐난을 보노라니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나는 지난해 여름과 올여름에 대통령비서실이 전기요금을 얼마나 썼나 궁금해 주민등록번호를 써내고 정보공개를 청구했었다. 월별 전기사용량(㎾h)과 전기요금(원)을 공개해 주세요, 법률에 따라 한 시민으로서 청구합니다…. 짤막한 결정통지는 결국 비공개였다. 기안자 이름이 익명이고 처리기관명만 ‘연설기록비서관’이라 알아볼 수 있었다. 이의신청을 거쳐 청구일로부터 1개월2일 만에 기각 사유를 읽었다. 청와대가 국가보안목표시설 ‘가급’으로서, 각종 보안장비 등이 배치돼 24시간 상시 비상체제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 비공개 결정의 대전제였다. 월별 전기사용량 및 전기요금 정보가 공개되면 국가안전보장에 관한 사항이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을 양지하라고도 했다. 끝으로 남긴 말은 이 정보를 공개하게 되면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현저히 해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됐다”는 것이었다.

청와대가 이렇게 설명하기에 이 나라 시민의 알 권리란 거기까지구나 했었다. 하지만 중진 의원의 메모장 군데군데에 한글과 영어로 적혀 있던 그 아름다운 ‘팩트’는 이제 무엇인가. 대통령의 연설문을, 청와대 고위직의 인사 정보를, 기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민감한 국정 관련 문건들을 미리 받아본 시민은 따로 있었다. 국가 이익이나 24시간 비상이란 말로 청와대의 전기요금을 감출 때, 부동산 개발 계획과 북한 국방위 비밀 접촉 사실, 한·일회담 시나리오는 보안에서 예외였다.

화가 치미는 이유는 최씨가 나처럼 정보공개를 기다릴 필요 없는 1등 시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어차피 철저한 ‘을’, 아니 ‘병’의 자세로 이야깃거리를 구하기로 마음먹은 신문기자다. 다만 이 나라 사회지도층의 마음속에 만연한 ‘내가 하면 로맨스다’가 혐오스럽다. 지난 25일 대통령이 문건 유출을 시인한 대국민 사과는 야구경기의 승부처 하이라이트 영상보다 짧았다. 그가 “문건을 외부에 유출하게 된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라 일갈했던 게 겨우 재작년 12월이다.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법적 조치로 다스리겠다던 엄포들은 이제 어디에 있는가. 봉건시대에도 없던 일이라며 역사와 상식 수업을 하던 이는 지금 더 할 말이 없는가. 그러잖아도 국민은 너무 자주 ‘네가 하면 스캔들’이라는 손가락질에 시달렸다. 최저생계비로 “황제 같은 생활을 했다”던 국회의원이 있었다. 진짜 황제들은 장막 뒤에서 김영란법의 밥값 제한에 화를 냈다. 검사와 판사들은 뇌물을 받아 감옥에 갔다. 모럴 해저드를 꾸짖고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던 이들이었다.

혼이 비정상이고 IS처럼 복면을 썼다가 숫제 개·돼지 조롱까지 받은 국민은 이제 아무것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저것은 우리더러만 ‘바람 풍’하라는 소리로구나, 피부에 닿는 현실은 책에 쓰여 있지 않구나. 한 의원의 나머지 메모지에 “백남기 영장 관련하여 ‘협의(유가족)’ 사항 아님”, 그리고 화살표가 향한 끝에 “영장이 집행되어야 함”이라고 적혀 있다. ‘바담 풍’만 하시는 로맨티스트들이 아셔야 할 것이 있다. 승마를 배우지 못하고 코너링 기술이 없는 젊은이들이 조국의 이름 앞에 ‘헬’을 붙이는 이유는, 돈이 아니라 신뢰를 가지지 못한 까닭이다.

글=이경원 사회부 기자 neosarim@kmib.co.kr, 삽화=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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