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남혁상] 신뢰 무참히 깨버린 대통령 기사의 사진
청와대 얘기를 잠깐 해보자.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춘추관(브리핑룸과 기자실이 있는 청와대 부속건물) 출입기자’다. 원칙적으로 청와대 출입이 제한돼 있는 탓이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진짜 청와대’로 들어가는 경우는 국무회의, 수석비서관회의 또는 외부인사 접견 등 공식 행사들에 한정된다. 그나마 취재기자 2명이 돌아가면서 대표 취재하는 이른바 풀(pool) 시스템으로 이뤄진다.

취재의 효율성 측면도 있지만 극도의 보안이 유지돼야 하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시쳇말로 ‘구중궁궐’로 불리는 청와대 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파악하기 힘든 구조인 셈이다. 청와대 출입기자가 청와대에서 벌어지는 일을 10%라도 알면 대단히 유능한 기자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대통령의 연설문, 주요 기념사, 회의 발언 등은 철저한 보안 속에서 초안이 잡히고 독회를 거쳐 완성된다. 이는 대내외 국가 정책에 대한 큰 방향과 대통령의 국정철학이 모두 담긴 요체로, 국가 정책 수립과 집행으로 이어진다. 대통령의 메시지가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청와대에서도 대통령의 극소수 참모만이 이 과정에 참여한다. 연설문, 기념사가 사전에 보안이 철저하게 유지되고, 불과 10분 전 배포돼도 엠바고(사전 보도유예)가 붙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던 상식이었다. 하지만 최근 며칠 사이 이런 상식은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보안 유지가 생명인 대통령 관련 자료들은 공적 자리 없는 민간인 한 명에게 무방비 상태로 넘어갔다. 박근혜 대통령 말처럼 ‘연설문이나 홍보물 등에서 도움을 받은’ 차원도 아닌 듯하다. 청와대 인사, 정부 정책까지 속속들이 ‘보고’한 것 아니냐는 지적에도 할 말이 없을 듯싶다.

박 대통령은 그 자신이 과거 청와대 문건의 외부 유출에 대해 엄정한 처벌을 강조해 왔다. 2014년 12월 최순실씨 전 남편인 정윤회씨의 ‘비선실세’ 논란이 한창일 때는 “문건을 외부로 유출한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국기문란 행위다. 일벌백계로 조치하겠다”고도 했다. 2년도 채 되지 않은 지금 박 대통령은 자신이 수사 대상이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에 처했다.

박 대통령의 연설문, 회의자료, 인사자료가 장기간 최씨에게 건네지기까지 일부 청와대 참모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취임 1년이 넘도록 이런 상황이 이어졌는데도 몰랐다면 청와대 비서진은 무능한 것이고, 알았다면 무책임한 것이다. 어느 쪽도 변명이 될 순 없다. 검찰 수사에 협조한다던 청와대가 이젠 그 의미조차 찾기 어려운 ‘보안시설’임을 들어 검찰 압수수색을 막는 것은 그래서 코미디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과거 대통령들에 비해 유독 ‘원칙과 신뢰’를 강조해 왔다. 그런 대통령이 국민의 신뢰를 무참히 깨버렸다. 매일 ‘국민과 민생’을 최우선으로 고민한다던 대통령은 이제 국민에게 좌절과 분노를 안겨버렸다. 과연 이 나라에 정부가 있느냐는 국민의 말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대통령의 권위는 사라졌고, 신뢰는 더 이상 찾을 수가 없게 됐다.

박 대통령에게 남은 선택지는 별로 없는 듯하다. 지금까지 해 왔던 소위 박 대통령의 인적 쇄신은 모두 실패했다. 쇄신 대상은 청와대 참모도 내각도 아니라 박 대통령 자신임을 깨달아야 한다. 한마디 사과로 끝날 상황도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제기됐던 여러 의혹에 대한 진상 규명에 직접 나서야 한다. 국민을 향한 깊은 사죄는 필수다. 그게 대한민국에 분노하고 절망감에 빠진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남혁상 정치부 차장 hs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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