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조준 <4> “대학시절 틈틈이 읽은 성경이 설교의 자양분”

신학교 진학으로 목사의 꿈에 다가가… 삼일·충신교회 전도사 거치며 준비

[역경의 열매] 박조준 <4> “대학시절 틈틈이 읽은 성경이 설교의 자양분” 기사의 사진
1950년대 말 서울 동자동 비누공장 2층 공간에서 예배드리던 충신교회 초창기 시절, 박조준 전도사(맨 오른쪽)와 성도들. 충신교회 제공
서울 수복 후 용산구 청파동 삼일교회 공터에 천막을 치고 지낸 적이 있다. 낮에는 학교를 가고, 저녁에는 그룹과외를 해서 생활비와 학비를 충당했다.

당시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는 방 두 칸짜리 연립주택으로 이사한 일이다. 부산 판자촌에서 지낼 때나 서울로 올라와 천막에서 생활할 때는 땅바닥에 두꺼운 걸 깔고 지냈다. 그 생활을 청산하고 온돌방에서 지내게 되니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청파동에서 서울대 문리대까지는 약 4㎞거리다. 당시 교통수단이라고는 전차(지금은 없어짐)와 버스뿐이었다. 하지만 콩나물시루처럼 복잡했고, 집에서 학교까지 꼬박 1시간이 걸렸다. 요즘처럼 거리가 복잡했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비교적 사람끼리 부딪치지 않고 손바닥만한 성경을 읽을 수가 있었다. 대학 시절 틈틈이 읽은 성경은 목사가 되고, 설교를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20대 초반 때 삼일교회의 총각집사로 임명됐다. 교회학교 부감과 어린이 찬양대 지휘를 맡으며 400명 넘는 유·초등부 학생들에게 설교한 경험은 훗날 목회 활동에 매우 유익한 거름이 됐다. 수십여 명의 교회학교 교사를 지휘했던 경험 역시 교회 제직회를 운영하는 데 유용했다.

목사가 되겠다는 어릴 적 꿈은 장로회신학대에 입학하면서 한걸음 더 가까워졌다. 입학하고 나니 이런 우스개 소리가 나돌았다. “신학교 1학년 때는 불이 붙는데, 2학년이 되면 연기만 나고, 3학년 졸업반이 되면 재만 남는다.” 좀 실망스러운 말로 들렸다.

‘내가 그래선 안 되지’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분명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신학생이 되면서 교역자 신분으로 교회를 섬겨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삼일교회가 분열 위기에 놓인 것이 아닌가. 나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기 싫어 다른 교회를 찾던 중 후암동에서 새 간판을 달고 시작하는 교회를 발견했다.

마침 20여명의 성도가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교회 관계자가 다가와 나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신학생이라고 소개하니 교회학교 학생부 설교를 부탁했다. 나중에는 수요기도회 설교까지 부탁받았다. 자연스럽게 그 교회에 출석하게 됐는데, 그 교회가 지금 한강변에 있는 충신교회다.

개척을 시작한 목사님은 대구에서 고아원을 운영하시던 분이었다. 토요일마다 상경하셔서 주일 예배를 인도하시고 이어 한주 동안 교우 심방을 하셨다. 그리고 다시 주일 예배를 인도하신 후 대구로 내려가셨다 상경하기를 반복하셨다. 그러다보니 목사님이 대구로 내려가 계신 한 주 동안에 새벽기도 인도자가 없었다. 마침 교회에 여전도회가 조직되면서 나를 전도사로 청빙했고 흔쾌히 응했다. 그때가 1957년 8월이었다.

당시 전도사인 나의 월 사례비는 500원. 턱없이 적은 액수였지만 사례비와 상관없이 교회를 섬겼다. 부족한 생활비는 매일 저녁 통신사 아르바이트로 보탰다. 그때 당시 나의 일정은 빈틈이 없었다. 매일 새벽 기도회를 인도하고, 신학교 수업을 마치는 대로 걸어서 교우 심방을 다녔다. 밤에는 또 아르바이트를 나갔다. 주일이면 교회학교 유·초·중·고등부를 책임졌고, 삼일기도회를 인도하고 가끔씩 주일 설교도 맡았다. 쉴 틈 없이 꽉 찬 전도사 생활이었다.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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