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한민수] 네 번이나 당한 배신의 기억 기사의 사진
도를 넘는 배신을 당하면 그와 연결된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게 사람 생리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당한 것일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속은 걸까”를 되짚어본다.

첫 번째 기억.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를 주도한 한나라당은 난파 직전으로 몰렸다. 그때 당대표에 출마한 박근혜는 이렇게 호소했다. “저에게 누가 있습니까? 부모도, 가족도 없습니다. 대의원, 당원 동지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체육관에 모인 노·장년 당원들의 가슴은 애잔함으로 가득했고 몰표로 이어졌다.

수첩공주에 관한 기억이 두 번째다. 그해 하반기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치열한 국가보안법 개정 협상을 벌였다. 당대표 박근혜는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상대가 여러 번 수정안을 내놔도 꿈쩍 하지 않았다. 양측이 의견을 모아가다가도 “그럼 우리 국군은 어떻게 되나요?”라는 박 대표의 한마디에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당시 손에는 작은 수첩이 들려 있었다. 거기에 적힌 내용을 벗어나지 않아 붙여진 이름이 바로 ‘수첩공주’다. 그땐 그가 안보 원칙주의자인줄 알았다.

세 번째는 대통령에게 ‘고언’을 한 기억이다. 2013년 3월 14일자 ‘대통령의 고독’이라는 칼럼을 통해 가정이 없는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고독을 이겨내기 위해선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라고 조언했다. 관저로 일을 가져가는 과중한 업무스타일을 걱정하기까지 했다. 끝으로 재작년 12월 정윤회의 국정개입 의혹이 일자 “청와대에 실세가 없으니까 (내가 키우는) 진돗개가 실세라는 얘기도 있다”고 말했을 때도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모두가 거짓으로 드러나고 있다. 최순실과 그 일족에게 둘러싸여 고독과 외로움을 느낄 순간도 없었던 그를 쥐뿔도 모르면서 위로했다니…. 진짜 가족은 멀리했지만 40년 지기인 두 사람은 ‘가족’ 이상의 관계를 맺어왔다. 관저로 돌아와 수시로 최순실을 만나거나 연락을 주고받은 것 같고, 수첩에는 온통 최씨와 그녀의 전 남편 정윤회의 ‘조언’만 담겨 있을 것 같아 괴롭다. 의혹이 아니라 합리적 의심 단계까지 왔다.

명색이 정치부 기자 출신도 이리 참담한데 국민들 마음은 어떨까. 지지자들의 배신감은 치가 떨릴 정도일 게다. 악몽을 떨쳐내기 위해선 논리적 치유가 필요하다. 도대체 ‘정치인 박근혜’는 누구일까. 두번 다시 속지 않으려면 우리 국민은 앞으로 어떤 리더십의 지도자를 선택해야 하는 것인가.

‘변혁적 리더십 이론’을 주창한 버나드 배스는 지도자의 4가지 특성으로 카리스마, 비전에 대한 공유, 지적 자극, 개별적 배려를 꼽았다. 각각 구성원과의 감정적 유대, 리더의 자기희생, 의사결정 역량의 향상, 신뢰 구축으로 연결된다. 대한민국의 18대 대통령 박근혜의 리더십은 해당되는 게 있을까. 그는 국민과 소통하지 않았고, 기밀인 연설문을 비선실세와 공유했다. 그 결과 국민적 신뢰를 상실했다. ‘혼이 비정상’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이상야릇한 말은 국민들의 지적 능력을 자극하지 못했다.

따라서 ‘박근혜 리더십’은 모두 해당이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뭘 보고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는가. 부모를 총탄에 여읜 전직 대통령의 딸이라서 측은지심에 표를 던진 이들이 부지기수다. 야당과 그 당 후보가 싫어서 반대한 유권자도 적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초유의 국가적 위기가 여기서 출발했다. 무심코 행사한 한 표가 초래하는 위험성은 막대하다.

박 대통령은 자신을 배신한 사람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럼 우리는? 믿었던 대통령에게 쓰라린 배신을 당한 국민들은 어떻게 되갚아줘야 하는가.

한민수 논설위원 ms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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