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전정희] “내가 조선의 무당이다” 기사의 사진
‘임오군란(1882년) 때 민비가 요사스런 무당과 왕래한 적이 있었다. 무당은 화복을 말하였는데 기이하게 적중했다. 복위할 달과 날짜를 정하는데 어긋난 게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크게 현혹되어 무당을 서울로 불러들여 관제묘의 북쪽에 살도록 하면서 굿을 주관하도록 했다. 매번 민비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머리를 쓰다듬고 배가 아프다고 하면 배를 쓰다듬었는데 손이 따를 때마다 통증이 감소하였다. 때문에 잠시라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로써 민비는 그를 언니라고 부르기도 하며 혹은 진령군이라 칭하기도 하고 북묘부인이라 칭하기도 했다. 겨우 1년이 되었는데도 위세는 날로 늘어나니 윤영식 조병식 이용직 등이 의를 맺고 누이라고 칭하였다.’(매천 황현의 기록 ‘오하기문’ 중)

“내가 조선의 국모다”라는 대사가 인상 깊은 뮤지컬 ‘명성황후’. 일본 침략에 맞선 한국판 잔다르크로 묘사된 명성황후, 즉 민비는 사실 부패한 민씨 권력의 최정점이었다. 조선은 정조 이후 80여년간 세도가 안동김씨와 여흥민씨가 절대권력을 휘둘러 망했다. 서세동점하는 국제 정세에도 두 권력은 멸망한 명나라를 북망하며 밤낮으로 제사를 지냈다. 그 귀신 섬김을 윤리삼아 백성을 옥죄어 수탈과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여자의 일생’으로 보자면 민비는 서글픈 여자였다. 기독교적 용어로 연단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그는 여덟 살에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한데 하루아침에 고종의 비로 추천됐다. 하지만 애가 생기지 않았다. 고종과 궁인 이씨 사이에 완화군이 태어났고 이를 예뻐한 시아버지 흥선대원군 때문에 민비는 깊은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독을 품기 시작했다. 다행히 원자가 태어났다. 그러나 5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여기다 임오군란으로 쫓기는 신세가 됐다. 고향 인근 충주에 숨어 살 때 무당과의 왕래가 시작됐다. 그 무당이 복위할 달과 날짜를 맞힌 것이다. 무당을 언니라 부르고, 무당의 영적 능력을 군사화해 진령군이란 벼슬을 내렸다. 최태민의 대한구국선교단과 진배없다. 이 진령군에 부역하는 자들도 생겼다. 동학교도의 교조신원청원이 들어오자 이를 일축해 더욱 탄압한 동학농민혁명의 원인 제공자 조병식 등이다.

굿 때문일까. 원자가 또 태어났다. 순종이다. 그는 병약했다. 트라우마가 깊었던 민비는 무당, 중 등을 불러 궐내 푸닥거리를 했다. 무당이 궁궐을 제집 드나들 듯했다. 유교 국가 조선은 억불이었으므로 무당과 중은 도성 출입이 불가능했다. 민비는 벼슬 판 돈으로 권력을 유지하며 무당에게 작호를 내리고, 명산대찰을 지어 자신을 위한 복을 빌도록 했다.

민비는 또 파티를 좋아했다. 기생을 불러 노래하게 했고, 명창을 불러 판소리를 즐겼다. 최태민 딸 최순실이 문화·연예·체육계를 쥐락펴락하며 즐기고 축재한 것과 같다. 민비가 입궁하던 병인년 제너럴셔먼호에서 대동강가에 성경이 뿌려졌고, 순종이 태어나던 해 정한론이 돌았다. 그럼에도 인재등용과 부국강병은 먼 나라 얘기였다. 오로지 척신권력 유지가 1순위였다.

성서적으로 인간은 죄성을 안고 태어난다. 누구나 삶이 고통스럽고 서글픈 이유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다’(시 51:5)라고 했다. 이 인간의 본질을 신앙이 해결한다. 복음이다. 예수의 복음은 나의 화복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의에 주린 자, 자비로운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가 복 있다(마 5:1∼12) 하였다.

‘들을 귀 없는 자’는 이 말씀이 불편하다. ‘그들을 먼저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을 떠나 저만을 위한 잡신을 찾는다. 최태민 최순실은 잡신을 찾는 이들을 포로로 삼았다. 민비 역시 잡혔다. 우리의 회개가 없는 한 역사는 치밀할 정도로 반복된다.

전정희 종교국 부국장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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