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고세욱] 정권의 봉은 숙명인가 기사의 사진
지난 9월 말 대기업의 ‘미르재단’ 출연 문제를 지적한 칼럼을 쓴 뒤 대기업에 다니는 지인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MB정부 때 기업들이 4대강 사업에 팔 비틀려 들어갔지만 담합했다고 기소까지 됐습니다. 4대강 사업에 참여 안 할 수 있었을까요. 기업의 숙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애잔한 느낌이 들었다. 살아있는 권력에 휘둘리는 처지를 이해 못 할 바 아니었다. 그에게 이런 답을 보냈다. “4차 산업혁명이 코앞인데 이런 것을 숙명이라고 (기업들이) 받아들여야 하니 착잡하네요.”

이후 불과 한 달 반도 안 돼 착잡함은 몇 배나 커졌다. 정권에 의해 팔 비틀렸다는 재계의 굴욕 모드는 재단 출연금 지원에만 그치지 않았다. 롯데는 K스포츠재단의 요청에 따라 출연금 외에 70억원을 건넸다. 나중에 돌려받았지만 검찰 내사 진행이 떳떳지 않은 자금지원의 배경이 됐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삼성은 ‘비선실세’ 최순실씨 딸의 말 구입 등에 35억원을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포스코, CJ, 부영그룹 등도 자의 반 타의 반 권력층에 협조하려 한 정황이 언론 보도에서 드러났다.

21세기에 벌어지는 기업의 정권 추종은 국민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몇몇 기업 관계자들은 “기업이 현 정부의 시대착오적 행태를 보면서 국제그룹 트라우마를 떠올리는 것 같다”고 말한다.

1985년 2월 공중분해된 국제그룹 사건은 한국 재벌 흑역사 중 단연 으뜸이다. 재계순위 6위의 국제그룹 해체는 부실기업 정리가 명분이었지만 사실상 정치 보복의 희생양이었다. 정권의 각종 모금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는 것이 정설이다.

월간지 ‘말’ 등의 보도를 보면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은 80년대 초 새세대육영회와 새마음심장재단이 2500여억원을 걷는 동안 한 푼도 내지 않았다. 10대그룹이 아닌 동국제강이 새마을성금 10억원을 낼 때 국제그룹은 고작(?) 3억원을 내 84년도 청와대 성금 납부실적 30위였다. 양 회장은 그룹 해체 발표 30분 전에 이를 통보받았다.

현 정부가 얼마나 몰상식하면 기업들이 31년 전의 공포를 떠올릴까 하는 동정심이 없지 않다. 하지만 한 세대가 흘렀음에도 정권의 삥 뜯기를 숙명으로 아는 기업의 마인드를 정상으로 보기도 어렵다. 숙명이라는 체념 속에 ‘이번에 잘 보이면 사업에 도움 될 것’이라는 보험 심리가 없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이런 면에서 기업이 최순실 사태에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가당찮다.

대기업 연합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는 틈만 나면 세금 외 각종 부담금인 준조세 폐지 및 축소를 요구해 왔다. 하지만 정작 정권의 강압적 모금 요구는 대부분 순순히 들어줬다. 뜯기면서도 대외적으로 자발적 참여라고 홍보까지 했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9월 “재벌들이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으로 합의된 농어촌 상생기금에 (준조세라며) 한 푼 내지 않았는데 (미르·K스포츠재단에) 800억원을 자발적으로 냈다는 건 소가 웃을 일”이라고 꼬집었다.

88년 5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한 세미나에서 국제그룹 해체를 거론하며 “정부는 그런 일을 다시 해서는 안 되고, 경제계도 그렇게 당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양정모 회장은 그룹 해체 이후 인터뷰에서 “나로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한다고 했는데 사회는 그것이 아닌 모양입니다”고 회한 어린 말을 내뱉었다. 이들의 말처럼 현 기업인들은 이렇게 당해서도 안 되고 정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앞장서야 한다. ‘정권의 봉 노릇이 숙명’이라는 변명은 더 이상 통할 수 없다. 고세욱 산업부 차장 swk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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