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피니언 > 칼럼 > 내일을열며

[내일을 열며-손영옥] 최순실 그리고 출세욕망

끝내 작동하지 않았던 국정농단 견제장치, 승자독식 사회서 경종은 쉽게 울리지 않는다

[내일을 열며-손영옥] 최순실 그리고 출세욕망 기사의 사진
“언니, 거긴 정말 보더리스(borderless·경계가 없는)의 나라예요. 어쩜 그렇게 모든 곳에 칸막이가 없을 수 있을까요.”

지난여름이다. K는 스웨덴 예찬론자가 돼 버렸다. 보름쯤 머물고 왔을 뿐인데 ‘멋진 신세계’를 구경하고 온 것처럼 ‘보더리스’를 연발했다.

‘비선실세’의 국정 농단이 되풀이됐다.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촛불 군중’이 불어나는 속도만큼 ‘역사의 진보’에 대한 회의가 깊어진다. ‘하야!’ 외침을 비집고 지난여름 내 귀를 사로잡은 단어 ‘보더리스’가 이명처럼 되살아난다.

정부의 연구 지원 프로젝트에 당선돼 그곳에 갔던 K는 “도심의 개울조차 턱이 없었다”며 일상의 풍경에도 칸막이를 배제한 스웨덴 문화에 감탄했다. 국민은 성공보다 삶의 의미를 이야기하고, 정부는 어떻게 1등을 키울지보다 꼴찌를 평균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을 고민하는 나라…. K는 “흑과 백 사이에 무수한 회색이 존재할 수 있는 나라”라고 정의했다.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세상이다.

그러고 보니 스웨덴 출신 마리아 린드가 예술감독을 맡은 올해의 광주비엔날레 전시방식이 이해가 됐다. 이번 광주비엔날레는 파티션을 없앤 게 특징이다. ‘보더리스’다. 칸막이를 치지 않아도 그 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서로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제 목소리를 냈다. 영상을 모은 전시실마저 그랬다. 한 작가의 비디오 영상 뒷면이 자연스럽게 다른 작가의 작품을 위해 벽이 되어주는 구조. 그 조화가 놀라웠다. 스펙터클에 익숙한 우리에겐 밍밍할 수 있는 전시다. 감독은 말했다. “대신 내면에서 거대한 스펙터클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더리스의 나라’ 스웨덴에서 나고 자란 감독이기에 가능했을 거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미디어 아트 중심의 비엔날레인 ‘미디어시티서울 2016’은 대척점에 선 전시다. 스타 큐레이터 백지숙씨가 예술감독을 맡았는데, 대가의 작품은 별도 방을 만들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식의 ‘칸막이 미학’이 빛났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지만, 한국식 전시 문법 안에서 빛났을 뿐이다.

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은 선거 절차를 통해 통치권을 위임받은 대통령이 권력을 사적 관계인에게 부여한 데 있다. 공식 직함도 갖지 않은 개인이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며 국정을 농단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견제장치는 왜 작동하지 않았을까. 도둑이 담을 넘으면 개는 짖어야 한다. 적반하장이지만 ‘최순실의 행동대장’으로 지목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조차 “민정만 제 역할을 했어도”라며 민정라인의 책임 방기를 원망했다. 청와대 참모진을 포함한 고위 공직자 누구도 충견의 역할을 하지 않았다. 있다면 최순실 게이트의 사전 경고등이었던 ‘(최순실 전 남편) 정윤회 감찰 문건’ 작성과 유출로 곤욕을 치른 조응천 전 비서관과 박관천 전 경정, 최순실의 딸 정유라가 출전한 승마대회에 대한 입바른 조사로 밉보여 좌천된 문화체육관광부의 국·과장 정도.

개인이 막기에는 불가항력의 사태였던가. 청와대에서 수석을 지낸 A씨는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출세를 포기하면 된다”고 말했다.

출세 욕망이 강한 건 한국 사회에 회색 지대가 없어서다. 승자가 독식하는 사회에선 비리에 눈감고 싶은 유혹이 강하다. 힘과 권력이 과도하게 한쪽으로 쏠린 사회 구조에서 경종은 쉽게 울리지 않는다. 최순실 게이트를 성찰하는 방법으로 광주비엔날레의 ‘보더리스 전시’ 구경을 권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지난 6일 종료됐다.

손영옥 문화부 선임기자 yosoh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