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태원준] 리플리증후군 기사의 사진
지난해 3월 서울 역삼동 오피스텔에 송파경찰서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니 8평 좁은 집은 디딜 수가 없었다. 음식쓰레기부터 속옷까지 잡동사니가 산을 이뤘다. 사기 용의자 안모(47·여)씨는 한동안 씻지 않은 듯했다. 악취를 풍겼고 추레한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왔다. 그는 온라인에서 미모의 자산관리사 ‘클레오 안’ 행세를 했다. 강남 사는 스위스 국적자인데 청와대 비자금 관리조직 ‘창’의 멤버라면서 교수 회계사 등에게 SNS로 접근했다. 일면식도 없이 메신저와 전화만으로 “좋은 투자처가 있다”며 2억원을 가로챘다. 그들에게 자기라고 보내준 사진 속 여인은 일본 연예인이었다.

연행해 조사하는데 안씨는 형사에게 “좋은 투자처” 얘기만 계속 했다. 이상해서 프로파일러를 투입했더니 리플리증후군이란 분석이 나왔다. 만들어낸 허구의 세계를 진실로 믿고 행동하는 인격장애를 말한다. 그는 자신이 정말 ‘미모의 자산관리사’라고 믿고 있었다. 이런 사람에게는 거짓말탐지기가 통하지 않는다.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말하기에 호흡 박동 혈압 등 생리적 변화가 없다. 미국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씨’에서 따온 병명은 2007년 신정아 사건에도 등장한다. 예일대 학력을 위조해 살아온 그를 외신은 ‘재능 있는 신정아씨’라 표현했고, 그를 모티브로 ‘미스 리플리’란 드라마도 방영됐다.

리플리증후군 환자의 공통점은 외롭고 불우한 과거, 관심을 받고픈 욕구, 오랜 고립, 현실도피 열망, 좁은 인간관계 등이라고 한다. 한 정신과 전문의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리플리증후군과 비슷한 증상이 보인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모두가 받드는 존재라고 믿으며 그 세계에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특수한 조건 때문에 주변에서 그런 세계를 포장해줘 안씨처럼 거짓말로 만들어낼 필요가 없었을 뿐이란다. 가설에 불과하긴 한데, 엄중한 민심을 보고도 그 자리에 있으려는 걸 보니 딴 세계에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글=태원준 논설위원, 삽화=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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