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한장희] 신화가 무참히 깨진 뒤… 기사의 사진
대마불사(大馬不死). 기업, 은행 심지어 정책 책임자까지 신봉했던 이 신화는 1997년 12월 무참히 깨졌다. 결과는 처참했다. 빌린 돈으로 몸집 키우기에 몰두했던 대기업들은 줄도산했고, 문 닫는 은행이 속출했다. 위기경보를 못 울린 정책 당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굴욕적 경제 신탁통치를 받아들여야 했다. 수많은 근로자들은 직장을 잃고 집으로 거리로 흩어졌다.

20년 후 또 하나의 신화가 깨졌다. ‘원칙’ ‘신뢰’ ‘애국심’으로 포장된 박근혜 신화가 최순실 게이트로 처절한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대통령을 등에 업은 최씨 일가는 국가권력을 사적으로 전용했다. 그것도 모자라 재벌과 대학, 체육단체 등 기득권 세력을 농락했다.

국민들은 집단우울증에 빠졌다. 한 여권 인사는 “너무 괴롭다”고 호소했다. 대통령의 ‘불통’을 늘 비판했지만 박근혜 신화는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전 국민이 눈에 보이는 것만 믿은, ‘동굴의 우상’에 갇혀 있었지 않나 싶다”고 했다.

박근혜 신화의 파탄은 국가 신화마저 위협하고 있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세월호 참사 7시간의 미스터리’가 자리잡고 있다.

권력과 권력의 정당성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공화국의 신화도 파괴될 지경이다. ‘콘크리트’로 불리던 지지자들마저 자기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하루빨리 퇴진해야 한다고 촛불 대열에 동참했다. 하지만 그들의 외침은 메아리가 없다. 대통령은 그저 “아니다” “소설이다”며 주권자인 국민의 목소리를 외면한 채 버티기에 돌입했다.

많은 석학과 원로가 위기를 얘기한다. 대통령에 대한 국민 신뢰가 무너진 것을 원인으로 든다. 신화 파괴 현상이 경제 분야에 전이될 경우 외환위기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경제·통화 당국은 여전히 “걱정할 단계는 아니다”고 말한다. 그들은 “과거와는 다르다”며 세계 7위 규모(3778억 달러·9월말 기준)의 외환보유액을 내세운다. 하지만 그들이 신봉하는 ‘건전성 신화’도 영 미덥지 않다. 최순실 게이트 발발 후 정부 시스템은 사실상 멈춰섰고, 경제 사령탑 공백 상황은 한 달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주식시장에선 외국계 자금이 슬금슬금 빠져나가고 있다. 미국의 금리 인상 관측에 신흥국 시장 포트폴리오를 조정하고 나선 것이다. 향후 외국인들이 돈을 뺄 신흥국을 고르는 데는 크게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국제 정상회담에도 참석 못할 정도의 리더십 부재 상황인 나라가 1순위가 될 게 뻔하다.

‘트럼프 리스크’는 눈덩이처럼 커진 가계부채 ‘폭탄’의 뇌관이다. IMF사태 직후 경험했듯 외국계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시중 금리는 올라가게 돼 있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한국은 1분기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84%로 18개 신흥국 중 가장 높다.

숫자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표면적으론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각종 경제지표는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수준으로 잇따라 곤두박질치고 있다. 청년실업률이 치솟고 장기 백수 비중도 외환위기 수준으로 늘면서 실업의 질이 급격히 악화됐다. 법원의 파산관리 기업 규모는 이미 외환위기 수준에 육박했다. 신용등급이 강등된 기업 수도 외환위기 이후 최대를 기록했다. 다시 위기가 온다면 1997년이나 2008년 위기 때보다 더 큰 충격이 될 것이다. 청와대가 검찰 수사 결과를 공격하면서 언급했던 사상누각(沙上樓閣)이라는 말이 경제 당국이 믿고 있는 신화의 이면이 아니기만 바랄 뿐이다.

한장희 경제부장 jh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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