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뉴스] 광장, 역사를 바꾸다 기사의 사진
서울시청과 광화문 앞은 한국 역사에서 시민의 여론이 폭발하는 광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지난 19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 국민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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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사전적 의미는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게 만든 넓은 빈터를 가리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광장은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정치·사회적 토론의 장으로서 여론을 확실히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직접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아고라’는 바로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광장이었습니다.

물론 광장이 늘 시민의 것은 아니었습니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는 한편 대중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이를 이용했습니다. 히틀러,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북한의 김일성 일가 등 악명 높은 독재자들이 광장에서 치른 초대형 열병식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광장은 권력을 무너뜨리는 혁명의 진원지로서도 계속 역할을 해왔습니다. 바스티유 광장에서 프랑스 대혁명이 촉발되는 등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수많은 혁명들이 바로 광장에서 처음 시작됐습니다.

한국 광장의 역사와 민주주의

우리 역사에서 광장이 민중의 정치적 요구를 드러낸 것은 1898년 종로 네 거리에서 열린 만민공동회가 사실상 처음이었습니다.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는 열강의 이권 침탈에 대항하고 국정개혁, 민권신장 등을 요구한 민중 대회였습니다.

이후 1919년 3·1운동은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습니다.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탑골공원에서는 시민들이 만세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만세 운동은 이후 전국으로 전파돼 민중의 강한 결집력을 보여줬습니다. 일본은 3·1운동에 놀란 나머지 무단정치를 문화정치로 바꿨을 정도입니다.

광복 이후에도 민중이 여러 차례 광장으로 나왔지만 한국 민주주의에 주춧돌을 놓은 사건을 꼽으라면 1960년 4·19혁명입니다. 당시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에 항의해 서울에서만 10만명 이상이 시내로 쏟아져 나왔고, 1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을 선포했지만 군대가 시민의 편을 들자 하야를 선택했습니다. 아시아 최초의 시민 민주주의 혁명이 성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라고 명시돼 있는데, 3·1운동과 4·19혁명 당시 광장에 나온 시민들의 뜻이 건국이념이 된 셈입니다.

다만 4·19혁명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불과 1년 후 소장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후 박정희 독재정치 아래에서 민중은 희생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광장으로 나왔습니다. 마침내 1979년 경남 부산과 마산에서 유신독재에 반대해 일어난 시위, 즉 부마항쟁은 박정희 정권의 핵심세력인 김재규와 차지철의 갈등을 야기하며 10·26사태의 원인이 됐습니다.

하지만 부마항쟁 역시 4·19혁명처럼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1980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던 ‘서울의 봄’은 김대중과 김영삼 등 양김의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그 사이 등장한 신군부 세력은 광주 5·18 민주화 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했습니다.

광장의 정신, 일상의 작은 정치로 가져와야

광장의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가져온 것은 1987년 6월 항쟁입니다. 당시 간선제 대통령 선출조항을 유지하겠다는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에 반대해 전국에서 시민들이 광장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이즈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이한열 최루탄 사망사건은 시민의 분노를 한층 키웠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6월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 투입을 검토했지만 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가 직선제를 수용하는 6·29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후 현행 9차 헌법이 탄생했고 현재까지 우리나라 정치와 법률의 기본이 됐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이후 좌절됐던 한국 민주주의를 시민의 힘으로 다시 세운 것입니다.

정치권의 분열에 따른 대선 패배로 6월 항쟁이 완벽한 승리로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후 시민들은 권력에 맞서 자신들의 분노를 확실히 드러낼 땐 광장으로 나왔는데요. 특히 2002년 한일월드컵 때 등장한 길거리 응원문화는 광장 사용의 주도권이 권력자에서 대중으로 바뀌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효순·미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2008년 이명박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협상, 2009년 노무현 대통령 노제 때 광장에는 시민들의 수많은 촛불이 켜졌습니다.

하지만 광장 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도 있습니다. 광장에서 군중집회가 자주 발생한다는 것은 그만큼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해방 정국의 친일파 처단과 농지 개혁부터 1980년과 1987년 민주화 항쟁 등 그동안 시민들이 광장에 나왔지만 결과적으로 권력교체에 실패해 체제를 바꾸지 못한 것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비관적일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한 교수는 “정치가들이 선거로 당선된 이후 제대로 민의를 반영하지 않기 때문에 시민들이 여전히 광장에 나오게 되는 것이다. 광장에서의 시민혁명이 그동안 실패했다고는 하지만 느리게나마 한국 민주주의도 꾸준히 발전해 왔다. 시민들의 주권의식도 매우 높아졌다”면서 “다만 그동안 한국정치가 광장과 여의도에만 있었다면 이제는 둘 사이를 잇는 실핏줄 정치가 살아나야 한다. 시민들도 일상에서부터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지난 10월 29일부터 토요일마다 광화문 광장에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한 수많은 시민이 모이고 있습니다. 광장에서 꾸준히 성숙해지고 있는 한국 민주주의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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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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