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명호] 루이 16세 기사의 사진
‘7월 14일 온종일 사냥을 하느라 고단하게 잠들었던 국왕은 다음 날 아침 리앙크루공(公)에게 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 “반란인가”라는 루이 16세의 물음에 “아닙니다. 혁명입니다”라고 대답했다.’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했던 지성 앙드레 모루아(1885∼1967)는 ‘프랑스사’(신용석 역)에서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 다음 날 아침을 이렇게 기록한다. 훗날 바스티유 점령은 봉건적 앙시앙레짐(구질서)을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의 출발점이라고 규정된다.

혁명은 쿠데타처럼 계획이 있는 게 아니라 초기에는 그 성격을 예측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하려고 한 게 아니라 권력에 항의하기 위해, 기득권의 독점을 깨기 위해, 충돌을 거듭하다 혁명으로 급진하게 된다. 바스티유 점령은 혁명사에서 극적인 사건일 뿐이다. 모루아는 ‘미국사’에서 1776년 7월 4일 필라델피아 대륙회의의 독립선언도 그렇게 묘사한다. 극적 사건이 있기까지 수년 또는 십수년의 숙성기간이 있다. 혁명의 징후와 내재적 요인이 켜켜이 쌓인다고나 할까.

‘프랑스 혁명은 폭동이 아니라 목가적인 분위기로 시작됐다.’ 모루아가 혁명을 기술한 첫 문장이다. 그해 1월 1일 루이 16세가 175년 만에 삼부회의를 소집하고 귀족과 성직자 아닌 제3신분의 정원을 두 배로 늘렸다는 소식에 모두가 폐하의 인덕에 감격해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는 것이다. 특권층과 서민에 대한 과세 차별, 이를 지지한 고등법원, 이에 대한 위정자들의 무관심, 재정 파탄이 삼부회의 소집 이유이자 혁명의 근본 원인이 된다. 그 후 4년 동안 폭력과 충돌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우유부단하고 정세를 정확히 파악 못한 궁정 속 루이 16세는 그런 기회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1793년 여론 압력 속에 재판에서 표결을 통해 불행한 최후를 맞는다. 초기의 판단력과 통찰력 미흡이 폭동과 반동, 수십만명의 필요 없는 죽음을 낳았다. 지도자의 판단과 결정은 그렇게 중요하다.

김명호 수석논설위원, 삽화=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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