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상기] 정경태 기자 기사의 사진
2012년 천명관이 내놓은 소설 ‘나의 삼촌 브루스 리’에는 정경태 기자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깡마른 몸에 늘 골골대는 허약체질인 정 기자는 1980년 반란의 수괴를 찬양하는 기사를 쓸 것을 종용받자 흔쾌히 동의한다. 그가 쓴 기사의 문장은 훌륭했다. 내용도 나무랄 데 없었다. 반란의 수괴는 구국의 영웅이자 대한민국을 이끌 위대한 영도자로 묘사된다. 하지만 정 기자는 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간다. 기사 문장의 첫 음절마다 숨겨놓은 암호문 ‘늑.대.가.나.타.났.다.’가 발각된 것이다. 그는 모진 고문을 받은 뒤 삼청교육대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소설의 주인공 권도운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정 기자는 이소룡을 추종한 권도운이 긴 세월동안 꾸역꾸역 살아남아 마침내 드라마틱한 인생유전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짓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지금도 정 기자처럼 글의 문장 첫 글자를 조합하면 원문과 전혀 다른 내용이 나타나게 하는 암호문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3월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이승만 공모전에서 최우수작과 입선작으로 선정된 작품들에 세로드립이 숨겨진 사실이 알려져 눈길을 끌었다. KBS 기자들은 지난 7월 청와대 보도개입 의혹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세로드립을 선보였다. 최근엔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인터넷 카페에 가입 인사말을 올리면서 ‘박근혜 하야하라’는 세로드립을 숨긴 네티즌도 있었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자. 정 기자는 정보부 지하실에서 암호문의 배후를 캐묻는 요원들에게 두 살배기 딸의 이름 ‘정한별’을 댄다. 그리고 “그 애는 나의 양심입니다. 바로 우리의 미래죠. 내가 믿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그 애가 나의 유일한 배후라고 할 수 있죠”라고 말한다.

비록 소설이지만 정 기자가 어린 딸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저항한 지 36년이 지났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쑥대밭이 된 대한민국은 과연 정 기자가 한별이에게 물려주려 했던 미래였을까?

글=김상기 차장, 삽화=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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