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태원준] 하야 성명 기사의 사진
“저는 오늘로 15년 동안 국민의 애환과 기쁨을 같이 나눴던 대통령직을 사퇴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렇게 ‘대통령직 사퇴’를 말했던 적이 있다. 2012년 11월 25일 대선후보 등록 기자회견을 할 때였다. 듣고 있던 기자들은 “어, 어…” 하며 술렁였고 앞줄 몇몇이 “의원직 사퇴”라고 알려줬다. 박 대통령은 “제가 뭐라 그랬습니까?” 하고선 “…국회의원직을 사퇴합니다”라고 다시 읽었다. 회견이 끝난 뒤 “감정이 북받쳐 실수했다”며 웃었다.

불길한 일의 전조였는지, 이 해프닝은 ‘연습’을 한 셈이 됐다. 박 대통령은 실수로 했던 말을 꼭 4년 만에 실제로 했다. 29일 3차 담화에서 “국회가 정권이양 일정과 방안을 마련해주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이 담화와 유사한 전례는 이승만 윤보선 최규하 전 대통령이 있었다. 각각 중대성명, 하야성명, 특별성명을 통해 대통령직 사퇴를 알렸다.

이승만의 중대성명은 유체이탈 화법의 원조 격이다.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3·15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박 대통령이 “이권을 챙기고 위법 행위까지 저질렀다 하니…”라고 했던 2차 담화와 같은 투였다. 윤보선은 5·16쿠데타 사흘 뒤 하야성명을 배포했다. “원래 덕이 없는 이 사람이… 군사혁명에 이르게 한 것을 생각할 때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외교적 무정부 상태란 지적에 번복했다가 이듬해 3월 2차 하야성명과 함께 물러났다. 최규하는 특별성명에서 책임정치 불신풍조 등을 장황하게 언급했다.

박 대통령의 3차 담화는 ‘조건부 하야성명’에 가깝다. “국가를 위한 사업이라 믿고 했던 일”이라며 변명을 끼워 넣은 대목이 탁 걸리지만, 하야의 조건은 정치권이 줄기차게 얘기했던 질서 있는 퇴진에 부합한다. 그런데 과연 국회에 정파를 떠나 정권이양 로드맵을 만들어낼 능력이 있을지, 이제는 그게 걱정이다.

글=태원준 논설위원, 삽화=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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