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한민수] ‘포스트 박근혜’도 불안하다 기사의 사진
국회가 9일 박근혜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키기 위한 탄핵소추안을 표결한다.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에 이어 두 번째다. 그만큼 대한민국 헌정사에 있어 대사건이다. 12년 전이 거대 정당 간 정치적 흥정에 따른 산물이었다면 이번 탄핵은 절대다수의 국민이 원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처럼 국민의 손으로 민주주의의 역사를 다시 쓰는 순간이지만 뭔가 개운치가 않다.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많은 이들은 토로한다. “우리 손으로 제왕적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있는데도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박 대통령을 동정하거나 그의 ‘선의(善意)’라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인정하는 건 결코 아니다.

‘무능과 무책임’. 두 단어가 박근혜정부와 동일시된 것은 꽤 됐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결정적이었다. 2년8개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왜 그런 사고가 일어났는지, 앞으로의 대형 참사는 어찌 막겠다는 건지 이 정부는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다. 전염병 메르스가 무차별적으로 확산되는 동안에도 정부는 손을 놓다시피 했다.

매년 변하는 대통령의 통일관을 지켜보는 것도 끔찍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로 출발한 통일정책은 드레스덴 선언(한반도 평화통일 구상)을 거쳐 통일대박까지 갔다가 개성공단 폐쇄를 찍고 북한 붕괴론으로 마무리됐다. 어느 정부에서도 5년 임기의 대통령이 국가, 국민의 안위와 직결되는 통일정책을 놓고 이같이 널을 뛴 적은 없었다. ‘대통령 박근혜’는 무능하고 무책임했다는 것 외에 따로 설명할 말이 없다. 그는 일개 사인(私人)에 불과한 최순실과 나랏일을 공유하며 헌정질서마저 유린했다.

대통령의 권위와 권능이 속절없이 무너지면서 이 땅의 선출 권력은 국회만 남게 됐다. 그런데 정치권은 국가적 위기를 해결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보다 못한 국민이 나섰다. 대통령의 국회 총리 추천 제안을 놓고 흔들릴 때, 질서 있는 퇴진 방법을 놓고 우왕좌왕할 때, 탄핵안 발의 날짜 하나를 잡지 못하고 지리멸렬할 때도 촛불이 뒤를 받쳤다. 한 치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던 그 촛불이 탄핵 이후 ‘포스트 박근혜’를 떠올리며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광장의 힘을 넘겨줄 정치세력과 정치인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무능과 무책임의 그림자만 드리워져 있는 탓이다.

최순실 사태가 불거진 지 두 달이 다 돼가지만 이 나라 정치권에는 앞으로 나라를 어떻게 바꾸고,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를 어렴풋하게라도 제시한 이가 없다. 야권의 대선주자 지지율 1, 2위가 난데없이 ‘고구마(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사이다(이재명 성남시장)’ 논쟁을 벌였으며 이에 질세라 김치(박원순 서울시장)와 밥(안희정 충남지사)이 끼어들었다. 집권여당 새누리당에는 촛불 따라 너울거리는 얍삽한 군상만 득실대고 있다. ‘232만 촛불민심’을 담아낼 그릇이 없다는 탄식이 터져 나오는 이유다.

정치학자들은 국정농단 사건의 원인으로 ‘박근혜의 개인적 캐릭터(성격)+제도상 허점’을 들고 있다. 못된 습성은 안타깝게도 대물림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박 대통령의 비선실세를 보고 ‘우리가 정권을 잡으면 나도 저리 말아먹어야지’ 하고 노리는 자가 없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먹고살기 바쁜 국민이 매번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올 수도 없다.

사람이 마땅치 않다면 제도를 고쳐 막는 수밖에 없다. 무능과 무책임한 자가 또다시 우리의 지도자가 되는 길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탄핵 이후 국가의 미래를 짤 기회가 정치권에 주어질 게다. 양심이 있다면 국민 불안을 씻어낼 수 있는 최소한의 합의라도 내놔야 한다.

한민수 논설위원 ms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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