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황주리의 나의 기쁜 도시] 영화 ‘색계’ 속의 上海 기사의 사진
황주리 그림
어릴 적 내가 간절히 꿈꾼 도시 중 하나가 중국 상하이(上海)다. 토요일 밤이면 텔레비전에서 상영해주던, 일제 강점기의 상하이임시정부가 무대였던 영화들은 늘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영화 속에서 보는 그 무대가 진짜 상하이는 아닐지라도, 그 우울한 아름다움이 배경에 깔린 1930, 40년대 상하이를 얼마나 오래도록 상상했을까?

그 상상이 영화 속에서 상상 그대로, 아니 상상 이상의 강력한 호소력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영화가 이안 감독의 ‘색계’다. 색계는 단연 내가 영화를 보고 잠을 이루지 못한 최고의 영화 중 하나다. 어쩌면 꿈에 그리던 상하이의 거리 풍경과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홀딱 반해 잠을 못 이뤘나 보다.

아주 오래전에 상하이를 처음 갔을 때와 영화 색계를 본 뒤 가본 상하이는 많이 다르게 느껴졌다. 영화는 그곳을 처음 간 것처럼 다시 여행하게 만든다. 그게 영화의 힘이다.

탕웨이와 양조위의 강렬한 정사 장면은 잊히지 않는 꿈처럼 리얼하고 전율이 일도록 무섭다. 이안 감독은 영화를 만들면서 색계의 원작자인 ‘장아이링’의 말처럼 “삶이라는 덫 안에 사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색’이라는 감정적 욕망과, ‘계’라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경계하는 이성적인 판단 중 어느 것이 우위인지, 결국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하나이면서 두 개인 삶의 색과 계의 허망함을 영화는 보여준다.

상하이 출신인 장아이링의 소설을 사랑하는 나는 이안 감독이 그저 원작을 각색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진정 그리워하고 갈망한 자아의 이면으로 들어가는 재연의 작업을 했다고 말했을 때 마음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그는 영화 색계 속에서 40년대 초 상하이의 분위기를 제대로 그려낸다.

상하이는 모든 아름다운 도시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 인상적인 도시다. 골동품 가게들이 즐비한 2012년 가을 상하이의 ‘더룬’ 예술거리를 걸으며 영화 색계의 배경이었던 1940년대 상하이 거리를 떠올렸다. 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왕치아즈가 친일파 정보부 대장인 ‘이’를 암살하기 위해 접근했다가 서로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영화 속 장면들이 현대적인 상하이 거리의 풍경에 겹쳐졌다. 어딘가 영화 속 보석가게가 있을 것만 같았다. 크고 아름다운 보석반지를 선물하면서 너를 지켜주고 싶다고 말하는 남자의 진심을 느끼며 여자는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남자에게 ‘도망쳐요’ 하고 소리친 뒤 상하이 거리를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착잡한 심경의 탕웨이 모습도 떠올랐다.

여자는 남자의 선물에 약하다. 아니 모든 인간은 선물에 약하다. 그 선물이 목적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그보다 잊히지 않는 건 없을 것이다. 2012년 가을의 상하이 역시 낭만이 뚝뚝 떨어지는 세련된 도시였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것이 있다. 지금은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대한민국 최초의 임시정부가 있었던 곳이라는 걸. 상하이 최대 번화가인 남경로와 나이트 라이프가 눈부신 신천지, 각국의 건축물들이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외탄의 낮과 밤과 상하이 옛 거리, 청나라 시대 초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시장골목, 상하이의 명소인 중국식 정원 예원, 동방명주 전망대와 월드금융센터 101층의 가장 멋진 야경, 오래된 공장들이 1999년에 문을 닫은 폐허의 자리에 많은 예술가들의 작업실과 갤러리들로 탈바꿈한 모간산로 50호 등을 돌아보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날 아침,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1933 라오창팡’이었다. 1933년 영국인 건축가에 의해 지어진, 도축되기 전에 소들을 머물게 했던 이른바 소 호텔을 개조해 만든 현대식 복합문화공간이다. 구불구불한 미로로 이어지는 건축물의 좁은 계단 길은 사람이 오르내리던 길이고, 넓은 평지 길은 소들이 오르내리는 길이었다 한다. 마치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빈의 시립아파트를 닮은 그곳은 슬픈 소들의 아우슈비츠를 연상케 했다.

소들의 처량한 울음소리의 기억을 뒤로하고 이제 이곳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명소로 거듭나 결혼식을 하는 장소로도 널리 이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죽은 소들 중 한 마리에 우리의 전생이 이어져 있다면 이런 쓸데없는 상상도 잠깐, 서울로 돌아온 나는 상하이의 낙엽 지는 거리에 내 소중한 무언가를 남겨두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황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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